조헌

 

강아지를 안고 있는 아이Ⅱ_140x140cm_Oil on canvas_2009

 

 

노암 갤러리

 

2009. 8. 26(수) ▶ 2009. 9. 1(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33 | T.02-720-2235

 

www.noamgallery.com

 

 

Diagramme-자화상_72.7x53cm(3면)_Oil on canvas_2009

 

 

  인간의 절박한 가치소견 상황에 관한 모든 것

  조헌의 그림을 보면 회화라는 것이 얼마나 깊이 있고 절실한 삶과 기억의 무게를 담아 낼 수 있는 매체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인생의 깊이와 영적인 기운, 삶과 죽음의 의미와 정서, 이런 것들이 한 폭의 회화에 녹아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인체로 집약되는 작품 세계는 하나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토대가 굳건하다. 인체와 관련된 연작은 무엇보다 왜곡되고 일그러진 표정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툼한 질감의 화면처리는 갖가지 풍상을 겪으면서 숱한 인고의 세월을 보낸 인간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인간의 실존적 생애를 꾸밈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인체는 두터운 마티엘 효과와 더불어 회색조에 가까운 무채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보기 좋은 인체가 아닌 파편화되고 분열 된 인체들은 불굴의 생명력을 내포한 어떤 힘의 원초성을 느끼게 하고 있다. 투박하고 거친 질감 속에 존재의 의미를 담고 있어 한편으로는 매우 무겁고 심각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 그가 표현해 왔던 인간의 형상은 거의 대부분 익명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인체가 발산하는 정서는 소외, 격리, 단절, 상실 등의 네거티브 한 측면과 또한 상대적으로 열망, 요청, 수용 성장하는 생명력 등의 적극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매우 진폭이 심하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사색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쉽게 해독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공업화, 기계화, 물질화 시대 속에서 삶의 여러 부분들을 훼손당하는 현대인에게 한순간이나마 숨통을 트게 하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그림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코드가 서로 공존하면서 상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자아의 불안정한 심리적 상황과 삶의 고뇌하는 흔적이 표출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어쩌면 주체의 사물화, 소외 이후에 도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그렇다고 단념할 수도 없는 인간의 절박한 가치소견의 상황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얼굴형상에서는 바니타스(vanitas: 죽음의 불가피성, 속세의 업적이나 쾌락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주로 다루었다. 바니타스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도록 타이른다. 후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초상화 뒷면에 죽음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같은 것을 자주 그렸는데, 바니타스는 이런 단순한 그림에서 발전했다.) 곧 인생무상의 지평을, 삶의 욕망을 정화하는 죽음, 주검의 지평을, 몸으로 환원된 존재의 조건을 정화하는 제의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러한 삶의 조건과 몸의 조건에 저변에는 표현주의적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 정서와 추상표현주의적 기법이 서로 공존한다. 즉 내면의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표현주의를, 감정을 반영하는 터치와 나이프로 드로잉 하는 표면화에서는 추상표현주의를, 드라마 또는 서사를 도입한다는 점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관통하고 있다.

 

 

네개의 시선 혹은 하나_162x112cm(4면)_Oil on canvas_2009

 

 

  두 번째로는 인체를 질료적 개념으로 보는 경향으로서 자연과 사물의 흔적, 정신적 순수, 무의식적 긴장, 자율적 의지 같은 영원에 대한 인간적인 갈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 의미들을 물질에 개입시킴으로써 물질과 정신의 틈새를 엿보고자 했던 의미심장한 뜻을 갖는다.    이를테면 인간의 육체가 유한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와 대조적인 특성 없는 것과 죽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과 거짓되지 않는 것 등을 물질에 투영시킴으로써 물성을 변형시키려 했던 것을 상기 할 수 있다. 이에 조헌은 일찍이 물질을 물질 자체로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유물론자가 되어 스스로를 거기에 귀의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주체를 물질에 비판적으로 관여시킴으로써 물질의 위세를 타파하고 이것들이 흔적으로 남겨지거나 종국에는 탈 물질화 되는 궁지에 이르도록 하려 했던 게 분명하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인물화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개의 형상과 가시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생선이 등장한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데 있어서 형태와 색깔을 통해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도 일체 보이지 않고 모든 감정의 표현을 배제하고 억제한다. 애당초 잘나게 그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나체를 그리고 있음에도 단순히 나체라기보다는 잔인할 정도로 노출되어 관객에게 던져진 존재로서 묘사되어 있다.

  고깃덩어리 같은 인간 마치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하나같이 잘생기거나 잘빠진 인물은 거의 없다. 삶의 온갖 피곤함과 절망, 두려움이 잔뜩 배어있기에, 도무지 활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인물을 마주 대하기에 부담스럽다. 특히나 누드는 그 강도가 매우 심해 리비도마저 상실한 모습이다.    

  오히려 불안함이나 불편한 감정을 유발시키고 다이내믹한 붓 터치와 긴장감이 느껴지는 화면과 부자연스런 자세 등등, 전통적, 혹은 상식적인 아름다움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흔히 에로틱하거나 장식적인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을 함께 떠올려 보면 얼마나 그의 그림이 다른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그로테스크라는 표현이외에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기괴한 그림들, 그가 그려내고 있는 인체와 개 모습은 모두 일그러져 있고, 분절되어 있으며 하나의 주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너무나 낯설고 이상한 세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몸서리 쳐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면서 그러한 기괴하고 잔인하며 일그러진 형태들을 그려갔던 것은 그의 내면에 어떠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新美人圖_53x41cm_Oil on canvas_2009

 

 

  이 모든 형상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되지 않는 몸뚱이 혹은 덩어리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동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자연적 순환을 보여주는 듯하며, 인물의 형상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얼굴로 나타나는데, 얼굴은 대상의 지시성(指示性)으로 인해 재현적 이어야하나, 알 수 없게 뭉개진 얼굴은 비재현적이다.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일그러지고 변형된 모습과 분노로 일그러진 개의 모습은 인간과 서로 공통되며, 결코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모습은 아니다.

  어쩐지 삶의 작은 장소로 표현할 수 있는 투견장의 철망 속에서 처절하게 싸우다 지치고 깨진 개의 모습에서 고단하고 공권력에 의해 부단히 능욕당하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의 연속인 고달픈 사람들에게 그의 그림은 잠시나마 잊고 싶은 공포와 고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가학증과도 같다.     이러한 끔찍한 감정의 노골적인 노출이 과연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안을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아니면 커다란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함으로써 오히려 작은 공포와 고통은 잊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닐까. 이러한 모든 질문들을 제쳐놓고 보더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서 현대미술에서 아름다움의 개념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떨칠 수가 없다.

조헌이 표현한 세계는 결코 이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언제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아니, 우리가 언제나 잊고 살고 싶어 했던 잔인하고도 이상한 세계는 결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상상이 가능한 지점에는 언제나 현실의 발현태가 존재한다는 그 무서운 실존은 그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 세상살이가 생각보다 녹녹하던가! 그것은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물들의 약육강식이 인간사에도 번번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처참하게 왜곡되고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에서, 아이러니 하게도 아름다움은 그곳에서부터 함께 한다는 귀중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지독한 슬픔이 슬픔을 위로할 수 있듯이, 지독한 잔인함과 혹독함, 그리고 냉정함이 순수와 따뜻함과 푸근함을 일깨워 주듯이 말이다.   

  이 같은 인체 그리기에서 인간가치의 재확인을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그것은 인간소외의 산업사회에서 변방으로 떨어진 참 삶의 회복 즉 인간회복의 갈구로서 그 같은 인체 작업을 지칠 줄 모르게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상실당하고 박탈당한 우리 시대의 소외된 인물에 한없는 애정을 보내면서 작가는 인간성 회복과 함께 참 생명의 고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김선태 (미술평론가) [미술평론집-형형색색 본문 중에서]

 

 

말 하거나 말 하지 않거나_162x80cm(2면)_Oil on canvas_2009

 
 

 

 
 

vol.20090826-조헌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