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성

 

‘따로,또,같이’-‘Alone but Together’

 

따로,또,같이-꽃을피우다_131x97cm_Oil on Canvas_2009

 

 

인사아트센터

 

2009. 8. 19(수) ▶ 2009. 8. 25(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3F | T.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갤러리 쌍리

 

2009. 8. 27(목) ▶ 2009. 9. 5(토)

대전 중구 대흥동 249-2 | T.042-253-8118

 

 

따로,또,같이-꽃을피우다_90x60cm_Oil on Canvas_2009

 

 

‘보는 방법’에 대한 탐구에서 서정적 풍경으로

                                                 박철화 (중앙대 예술대교수)

미술이란 보는 행위를 전제로 출발한다. 그 점은 작가의 창작과 관객의 수용 모두에 있어 마찬가지다. 하지만 본다는 행위가 그렇게 자명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먼저 보는 주체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생각하는 나’라는 이성의 주체를 찾아낸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처럼 ‘보는 나’라는 시각(視覺)의 주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성의 주체가 많은 저항을 받았듯이 시각의 주체 역시 완전하지 않다. 같은 시공간 속에서도 우리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으며, 하물며 시간이나 공간이 달라지면 우리가 본다는 행위의 양태는 완연히 달라질 수 있다. 이 경우 시각의 주체란 안전하게 기댈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 ‘볼’ 수 있는가?

보는 행위는 또한 주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행위에는 반드시 대상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본다. 그런데 대상으로서의 무엇은 확실한가?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굳이 철학사의 어려운 담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보는 주체가 동일한 경우에도 대상은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보기도 하며, 또 그렇게 뚫어져라 보았던 것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고 지나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각의 대상 역시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시각의 불완전함은 이처럼 주체와 대상 모두와 관련을 맺고 있다. 김진성의 작업은 그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우리의 ‘보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그가 꾸준히 제기한 화두가 바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바라봄’, ‘시선(視線)’ 등이다. 대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체로, 그리고 다시 주체와대상의 ‘관계’로 그의 작업은 깊이를 얻고 있다. 그의 변화를 깊이의 획득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각으로부터 지각과 인식의 단계로 그의 질문이 날카로워지기 때문이다.

 

 

따로,또,같이-꽃을피우다_46x61cm_Oil on Canvas_2009

 

 

영어의 보다see 와 알다know는 같은 의미로 쓰이며, 프랑스어 보다 voir와 알다 savoir는 갖다 avoir라는 말과 함께 더욱 그 같은 뿌리를 증명한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나가며, 따라서 ‘보는 방법’에 대한 탐구는 주체로서의 우리와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알아나가는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다르게 볼 수 있다면 세상을 다르게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꽃을 피우다’ 연작은 이런 보는 방법에 대한 탐구의 한 표현이다. 우리의 시지각은 어느 정도는 관습적으로 자동화되어 있어 명확히 대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즉 대상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수시로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의 한 부분일 뿐인 무늬는 대상의 밖으로 나가 전체로서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대상만도, 그렇다고 무늬만도 아닌,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이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대상을 보는 우리의 자동화된 지각체계에 대해, 그리고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계기를 얻는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이 작업은 이미 김진성이 그의 첫 개인전에서부터 선보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전시에서의 ‘보이지 않는 것’ 연작이 이미 인체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지각 체계에 대한 질문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각과 인식이라는, 보는 방법에 관한 과학적 탐구에 가깝다.

 

 

따로,또,같이-한강으로 산책_90x60cm_Oil on Canvas_2009

 

 

그에 반해 이번 네 번째 전시에서의 나머지 작품들은 의미 있는 변화의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대상과 기억’, 또는 좀 더 알려진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물질과 기억’의 관계를 보여주는 풍경으로 승화되어 있다. 그렇다. 이 작업은 그의 이미지를 과학적 탐구를 위한 자료에서 끌어내 서정적 울림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보는 주체는 이미 풍경 속에 융화되어 있다. 이전의 작업에서처럼 주체와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된, 즉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서정적 풍경인 것이다.

‘동네’, ‘비행’, ‘시골집’, ‘한강으로 산책’ 등의 작업은 대상이 촉발시킨 하나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이미 대상과는 다른 새로운 '풍경 paysage'이다. 그때의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가장 내밀한 세계와 만나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거의 단색조에 가까운 맑은 고딕은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기억과 영혼의 영사막이 되어 우리를 비춘다. 거기서 시골집을 만나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호젓한 동네를 돌아보게 되고, 자그마한 자전거를 끌고는 강가로 나아가는 우리의 유년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시지각의 주체, 인식의 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대상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융화하여 이미 다른 것, 아니 차라리 ‘주체-대상’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들로 태어난다. 그 태어남이 바로 존재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닐 것인가? 보는 방법의 변화를 통해 찾아내야 할, ‘따로 또 함께’ 하는 우리들 생의 가장 소중한 모습들 말이다.

 

 

따로,또,같이-동네_112x162cm_Oil on Canvas_2009

 

 

따로,또,같이-시골집_117x91cm_Oil on Canvas_2009

 

 

따로,또,같이-비행_90x60cm_Oil on Canvas_2009

 

 

 

 
 

■ 김진성

한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한남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09  제4회개인전 “따로,또,같이” (인사아트센터 서울, 갤러리쌍리 대전) | 2007  2007아트서울 “시선”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 2006  제3회개인전“시선” (이안갤러리 대전) | 2005  제2회개인전“theoria"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 2002  제1회개인전“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갤러리아 타임월드 갤러리  대전)

 
 

vol.20090819-김진성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