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

 

Camille Pissarro_Autumn,Morning Mist, Eragny sur Epte

 

 

아람미술관

 

2009. 1. 6(화) ▶ 2009. 3. 25(수)

412-812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816 | T.031-960-0180

 

www.artgy.or.kr

 

 

Camille Pissaro_The Tuileries Gardens, Rainy Weather

 

 

인상파의 거장 카미유 피사로는 유화, 수채화, 동판화, 석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인상주의를 밀고나왔고 이를 완성시킨 인물로 근대의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8회에 걸친 인상파전에 한번도 거르지 않고 출품한 유일한 화가로, 그의 전원 풍경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틈틈이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대지의 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바르비종파와 밀레를 계승한 성실한 화가였던 그는 74년 생애 전반에 걸쳐 고귀하고 정열적으로 최후까지 그림을 제작했다. 피사로는 25세가 되던 해, 화가를 꿈꾸며 파리로 나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본 바르비종파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코로, 쿠르베, 밀레, 도비니를 스승으로 섬기며 독자적인 예술을 확립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코로를 비롯하여 바르비종파의 화가들과 꾸준하게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한편 피사로는 교육자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잔느는 피사로에 대해 “내게 있어 아버지였다. 그는 배울 가치가 있는 사람이자 전능하신 신과도 닮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피사로는 5명의 아들들에게 직접 그림을 가르쳤으며, 이들은 ‘에라니파’라는 유파를 형성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고 특히 장남인 뤼시앵 피사로는 영국에서 인상파의 보급에 공헌했다.

이 전시회는 피사로가 영향을 받은 코로, 밀레의 작품을 비롯하여, 카미유 피사로를 중심으로 뤼시앵, 페릭스, 뤼드빅 등 피사로家의 유화 또는 소묘, 판화를 가지고 피사로의 다양한 업적과 인간적 면모를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다.

 

 

Camille Pissarro_View from my Window, Eragny sur Epte

 

 

 
 

■  카미유 피사로 (1830.7.10 ~ 1903.11.13)

카미유 피사로는 1830년 당시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토마스 섬에 유대 계통의 프랑스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서구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교육을 받기 위해 갔으나, 프랑스에 대한 많은 애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덴마크 국적을 유지하고 프랑스 사회와 정치의 변함없는 비판자가 되었다. 피사로는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초기 교육 시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국제적인 항구도시에서 자라 프랑스어와 더불어 영어와 스페인어를 습득했다. 프랑스 인상파의 거장인 피사로는 그가 갖는 종교적 배경, 출신의 지방성, 그리고 정치관으로 인해 완벽한 프랑스인이 될 수는 없었다.

1870~80년대에는 인상파의 회화는 너무도 냉대 받고 있었고, 피사로, 모네, 그리고 르느와르는 작품의 살롱 출품을 단념하고 자기들의 작품을 공개하기 위한 전람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동지를 모아 1874년 제 1회 인상파전을 개최했다. 그 이후 8회 열리게 된 인상파전에 빠지지 않고 참가한 것은 피사로뿐이었다. 조직된 협회는 항상 불화와 분열의 위기를 지니고 있었고, 매회 개최되기까지의 과정이 인상파의 고심의 역사임과 동시에 피사로의 생애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파산이나 다름없는 제 1회전에 이어진 피사로의 화업은 복잡하게 뒤엉켜, 점차 풍경화 제작을 줄이고 밀레류의 농민이 있는 풍경화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1876년에는 2년간에 걸쳐 농민풍속의 묘사를 그만두고 강변의 풍경과 공장, 또다시 일변하여 판화제작에 몸 바쳤다. 피사로는 1883년에 시냐크, 쇠라와 만나 신인상파의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사로에 있어 점묘는 장기간 화실에서의 제작이 필요한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을 눈앞에 두고 얻을 수 있는 여러 감각을 화실에서 기억만으로 그린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후의 피사로는 신인상주의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곧은 신념과 자상한 면모로 많은 신인상파 화가들의 존경을 얻는 ‘인상파의 아버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vol.20090106-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