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展

 

박진호

 

 

갤러리 나우

 

2008. 12. 24(수) ▶ 2009. 1. 6(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성지빌딩 3층 | 02-725-2930

 

www.gallery-now.com

 

 

박진호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추억할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반면 추억할 일이 없다는 것은 젊다는 얘기고, 추억할 일이 적다는 것은 심심하게 살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갈수록 추억이 많이 떠오르는 요즘 나는, 나이를 제법 먹어 가고 있다는 것일 테고, 또 삼삼하게 살았다는 말도 된다. 나름대로...

추억에 젖다 보면... 어쩌다 작은 슬픔에 젖을 때가 종종자주자꾸 생겨난다. 먼저 보내는 사람들이 종종자주자꾸 생겨나고, 그들이 종종자주자꾸 생각난다.

처음에는 정말 되게 슬펐다. 누구였더라... 제일 먼저 보낸 사람이... 제일 먼저 가신 분이...

큰 매형 그 다음 대학 2년 선배 병운 형 그 다음 둘째누나 그 다음 첫째 작은 고모 그 다음 큰 고모 그 다음 큰 이모 그 다음 엄마 그 다음 셋째 고모 그 다음 육촌 조원이 형 그 다음 당숙모 그 전에전에 훨씬 전에 외삼촌 순서가 엉키기 시작한다... 처음 세 번째까지는 울었다. 음,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엄마 때가 제일 슬펐다. 크게 슬펐다. 그래서 불쌍한 막내라고 하나보다. 마지막 꼬래비로 태어나서 막내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는 게 막내인가보다. 근데 정말 그럴까?  

 

 

박진호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신파적이기도 하고 고삐리 감상 같기도 하다 아니아니 찬찬히 생각해 보면 소월 시의 한 구절 같기도 하고 영랑 시의 한 구절 같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희곡 어디에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좋아 하는 내 동갑내기 함민복 시인의 산문에 나오는 글 같기도 하고 또 내가 좋아 하는 한명희 시인의 시 어느 한 구절 같기도 하다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그들 글 어디에 삽입되어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하다 사실 이 문장을 내가 처음 접했던 것은 대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 때 3학년은 아닌 것 같다 그때쯤 나는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라는 말을 두어 번 인용하며 사용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말을 하며 내 감정 표현을 했을 때 내 친구 중 가장 문학에 가까웠던 병훈이가 와우! 하며 너 새끼야 그 말... 멋있다... 네 머리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병훈이가 학사경고 맞고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기 때문에 내가 3학년 4학년 때 그런 얘기를 나눴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뉴질랜드로 이민 간 병훈이가 보고 싶다 어쨌든 조각난 하이쿠의 한 구절 같은 이 문장은 사진 작품 제목이었다 병훈이 불알친구 경우가 다니던 모 대학 사진반의 어느 여학생이 동아리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의 제목이었다 나는 병훈이랑 함께 경우에게 술 얻어먹으러 전시장에 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품도 보고 팜플렛도 들고 나왔던 것 같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말하는데 나는 그 여학생을 못보고 나왔다 아니 봤는데 내 타입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작품은 아마도 아스팔트 위에 고여 있는 물을 전면에 클로즈업하고 뒤는 별다른 배경이 없었던 것 같고 하늘은 먹구름 사이로 약간 하얀 하늘이 살짝 내비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모든 기억은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가공의 기억 기억의 가공일 수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 기억을 가공하기도 하고 가공의 기억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 같다. 별거 아닌 옛날 일이 기억나면서 혼자 쑥스러워지기도 하고, 좀 창피했던 일도 살다보면 그런 일쯤이야 일도 아니지, 아무렴, 아무 일도 아니야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이 제대로 된 기억이라는 것에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사실 기억만이 아니라, 큰일에는 담담덤덤하고 작은 일에는 울렁울렁두근두근 하기도 한다. 마음속 메커니즘이 좀 바뀐 것 같다.

여하튼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는 26, 7년 동안 내 머릿속을 들락거렸던 거다. 최근 이 문장이 떠오르기까지 최소 몇 년 동안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정확하다. 이 문장이 떠오른 것은 전적으로 요즘의 내 디프레스 상태 때문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진척 없는 책 쓴답시고 작업실에서 새벽녘까지 있으면서 어쩌다 가끔씩 달을 찍고, 달이 없을 때는 하늘도 찍었다. 그러고는 디지털 카메라 액정으로만 확인하고 바로 컴퓨터에 넣고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책 써야 하니까... 그런데 자꾸 슬프고 힘든 일이 연이어 생기면서 패닉이 이런 거구나 라고 느끼던 차, 내가 저술가가 아니라 사진가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그것을 깨는 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개인전….

 

 

박진호

 

 

상념에 젖어 모니터로 달을 보고, 달 없는 하늘을 보는데, ‘확’하고 바로 이 문장,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 순간! 같은 뿌리이면서 일찍이 먼저 개념을 잡았던 ‘저 달을 내가 움직였다’와 갈라진다. 달 없는 하늘, 움직이다 만 달은 나에게 또 다른 어떤 의미를 던졌다. 그랬다. 달을 찍을 때는 달을 보고 무엇인가를 기원했다. 달이 없을 때는 기원할 것이 없었다. 달은 신(神)이니까…. 없는 신에게는 기원할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움직이지 않은 달은 신이 아닌 것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걸 왜 몇 년씩 찍었는지를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라는 이 문장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될 것 같다. 큰일이라는 것이 뭐 있겠는가? 세상일이 크다면 다 큰일이고 작다면 다 작은 일 일터... 그렇다고 슬픔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 역시 아닐 터... 어쩌다 큰 슬픔이 있을 때 그것을 작게 느끼는 것 또한 삶의 지혜일 터... 살 때까지는 나름대로 지혜롭게 사는 것 또한 중요할 터...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 주변 사람들을 자꾸 보내게 된다는 것... 내가 작가임을 느끼게 되는 것...

 

2008.9.7. 새벽. 06.09. 작업실에서...

 

 

박진호

 
 

 

 
 

vol. 20081224-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