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 이야기

 

-A Tale of Two Children-

 

박대조_깨어진 동심(Broken heart)_100.4×93.6cm_대리석, 아크릴, 먹, 혼합재료_2008

 

 

갤러리 진선 1,2층

 

2008. 11. 5(수) ▶ 2008. 11. 23(일)

110-220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161번지 | T.02-723-3340

 

www.jinsunart.com

 

 

박대조_원죄 없는 잉태(Immaculate Conception)_82.7×80cm_transparency in light box_2008

 

 

‘두 아이 이야기 전’에서는 아이(child)라는 공통적인 소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파야와 박대조 작가의 표현양식은 매우 대조적이다.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파야의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매우 돋보이고 있다. ‘Noblesse Children’이라는 타이틀로 표현되는 파야의 작품들이 명품을 걸친 아이들의 익살스런 표정을 보여줌으로써 물질 만능주의 세태를 꼬집는다고 말하는 것은 일견 타당한 듯해 보이나 너무 편협한 해석이다.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의 익살스런 통찰력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작품 감상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 박대조 작가의 작품은 사뭇 엄숙해 보인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눈동자에 새겨진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통해 작가는 세상의 이중적 아이러니를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야_Noblesse Children #34_60×80cm_lambda print, saitec_2008

 

 

 ‘두 아이 이야기(A Tale of Two Children)展’

갤러리 진선 관장 허선

아이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이 천진, 순수, 유쾌함, 단순성 혹은 그 무엇이라 불리던 명칭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천진하게 보여지고 느껴져야 할 아이들의 모습에서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누구의 탓일까? 이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삶의 아이러니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적어도 파야와 박대조 작가의 작품속에서는 말이다.

이번 전시를 굳이 ‘두 아이 이야기’라 이름 붙인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아이러니라는 이중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파야의 작품 속에 명품을 걸치고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아이들.

작가 파야가 무엇을 의도했던 혹자들은 천진스런 아이들이 명품을 걸치고 흐뭇해하는 모습을 통해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세태들 풍자했다고 말한다. 이 해석은 일견 타당하고 삶의 이중성을 아이들과 명품이라는 상징을 통해 그리 불쾌하게만은 느껴지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파야의 작품을 여기에 국한 시키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매우 편협한 시각이다.

작가 파야의 강점은 이른바 ‘살짝 비틀기’ 혹은 ‘그냥 한번 뒤집어 보기’다. 캐릭터화 된 아이들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그리 무겁지 않게 어쩌면 그냥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올 만큼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 파야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표현능력이고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한 미덕이다. 다른 한편 박대조 작가의 작품속에 나타난 아이들의 모습은 파야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파야_Noblesse Children #35_117×90cm_lambda print, saitec_2008

 

 

작가 박대조가 표현 대상을 아이로 선택한 것은 그의 작품 철학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품속에서 노장사상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을 녹여내려고 했던 작가가 天眞으로 상징되는 아이들을 소재로 삼은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소재로서의 아이들이라는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노장과 실존사이에서 고민했던 작가의 정신적 갈등과 고뇌는 이번 작품들에서 여전히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하고 천진스러운 아이들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테러, 생태파괴와 환경오염. 순수하게 빛나야 할 아이들의 얼굴엔 무표정을 넘어 이제 슬픔의 그림자까지 드리워진다.

여기서 다시 삶의 아이러니라는 모순적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는 박대조의 작품을 세태고발이나 사회비판의 전형으로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작가의 진짜 고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 박대조에게는 더 큰 딜레마와 더 큰 삶의 아이러니가 남겨져 있다.무의자연의 완전을 추구했던 작가에게 부조리한 실존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 둘 사이의 탐색과 여정이 곧 작가 박대조의 작품들인 것이다. 이렇게 무위자연의 상징인 아이들과 부조리한 실존인 사회병폐의 갈등이 그의 작품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했던 순수와 단순의 상징인 아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의 실체를 이제는 깨달을 수 있게 됐는가? 그 깨달음의 해답을 적어도 해답의 단초를 파야와 박대조 두 작품의 작품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vol.20081105-두 아이 이야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