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진 展

 

A little too far & just beyond_455X182cm_acrylic on charcoalbord & wire_2008

 

 

노암갤러리

 

2008. 11. 3(월) ▶ 2008. 11. 11(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33 | T.02-720-2235

 

www.noamgallery.com

 

 

The field_182X227cm_mixed media on charcoalboad & gas flame_2008

 

        

나의 작업들은 정형된 어떤 상태나 정황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는 의도로써 시각경험의 잔상인 도구로써의 구조물들을 왜곡된 변형태로 변화과정의 기록들이다. 이로써 정의되고 규정된 것들에 대해 부여된 지위를 탈출시키고 그것들의 내재적 가능성인 모호한 본성을 노출시키고자 함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개념과 지시물 사이의 불확실한 관계 혹은 같은 항목들에서 너무 다른 속성들을 흔히 경험하곤 한다. 이것은 현실존재들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로부터 연유되는 것으로 보며 본인 작업의 중심테제인 구조적 형태의 개념화된 왜곡을 통한 시각실험은 의식과 감수성에 기반하는 현존재의 확인과정인 것이다. '죽음만큼 힘든 존재초월의 순간에야, 비로서 우리는 존재한다'

 

세계의 이해가 개개 삶의 경험들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개인이 경험한 시. 공간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본인의 경우 우리나라 7-80년대 성장기를 산업도시인 인천에서 겪었다. 지금은 토크쇼의 농거리로 등장하는 이 시기가 본인의 작품에서 일종의 주술처럼 엮여져 중첩되고 있는듯 하다. 인천은 전후(戰後) 수도서울의 주변위성도시로서 산업물의 생산지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자동차공장과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원목 가공공장들, 거기로부터 피어오르는 연기 등이 어우러져 환타지한 초현실적 장면이 연출되곤 했었다. 지금도 가끔 경인고속도를 관통하노라면 거대한 공장에서 번져나는 을씬한 커피향을 맏으며 라디오 주파수의 사각지대를 지나쳐 인천에 다다르게 된다. 본인에게는 매번 낯설게 느껴지는 이 상황을 격을 때면 멜랑꼬리한 감정에 몰입되곤 한다. 아마도 유년시절의 결핍요소들에 대한 회한같은 것이 중첩되리라 여겨지는 이 상태는 자연스레 산업화의 과정에서 발생되는 여러 단초들에 연관한 시대적 몽상으로 연결된다. 몽상은 개인의 문제를 떠난 동시대인들의 운명적 슬픔과 관계들의 현 사태와 의지와 감각의 해방 등의 문제로 확장되며 이것이 곧 현재의 시각실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되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재현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작품 역시 근대화과정에서 산업사회를 지나면서 체험된 것들부터 발생한 결핍이 기저에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인천 아니 산업시대 7-80년대 한국의 시각 환경은 그런 것이었다. 자연이란 것조차도 도시인에겐 산업의 부산물로, 지방인에겐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인간의 삶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수잔 손탁의 지적대로 '과학 문화와 기계의 도래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비록 언제나 가상일테지만, 진정한 평화와 화합의 근거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존재들의 가치정립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흔적과 결과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며 적어도 한 시대의 진솔한 분석이 부재하는 한 화해란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마치 한국사회의 해방후 미완된 사회문제들이 오늘날까지 몰화해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처럼 비합리의 또 다른 반복인 것이다. '과거는 자신을 방어하고 정체를 숨기면서 현재와 미래를 지배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속도에 반응하고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컨텐츠의 풍부함보다는 하드웨어적 성장을 지시하며 이것이 곧 우리의 존재 기반이 된다. 불완전한 근대화를 지나 최근 우리는 IT강국의 애칭을 얻었지만 여기에는 자살율과 출산저하, 불행지수와 비효율국가의 호칭이 동반되었다. 화폐가치만이 이념의 '일방통행로'가 되는 동시대의 흐름(당연히 예술조차도)에서 역시 벤야민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이용할 것인가?' 의 문제이다. 작품들은 체험 속에 각인되어 있는 산업시대 잔상들인 도구로써의 구조물들로부터 출발한다. 이것들에 나름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도구 아닌 도구 즉, 모호한 중성사물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이것들은 기형의 왜곡된 형태들로 되어 화면을 부유하며 '조금은 너무 먼, 그러면서도 바로 너머의(A little too far.. and just beyond..)'  분위기로 드러난다. 회화와 오브제 설치물 등을 이용하여 표현되는 일련의 형태들은 몽환적인 아련한 분위기로써 연출되며 확정된 세계의 '것'들로부터 비 확정적 세계의 '상태'로 변화하는 엔트로피적 이행과정을 겪는다. 화면에 어슴프레 존재하는 변형된 구조물들은 확대하자면 문명의 상징들이다. 기형 혹은 결함된 형태들은 또한 평면이면서 함몰된 듯한 모호한 화면인 들(field)에 놓여져 있다. 침묵하는 것(형태)들이 보여주는 잔잔한 움직임(분위기)의 장면은 형상의 내러티브보다는 직관과 감수성에 의존하여 지각된다. 때로는 평면적으로 때로는 비논리적 투시원근방식으로 놓여있는 형태와 분위기가 제시하는 불확정적인 모호함은 다시 한번 신화 속의 센토(centaur)로 상징된다.

 

 

The field_182X152cm_acrylic on charcoalboad & LED_2008

 

 

작품제작은 몇 가지 단순한 프로세스로 함축되며,  간결한 제작과정 각각은 반복적이며 재료와 의도와의 최선의 조율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재료가 자체의 에너지를 간직하는가의 문제는 본인의 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데, 물질이 감각에 전해주는 생경함은 작품제작자들에게는 늘 만만치 않은 숙제인 바, 온전한 물질감과 동시에 화면에서 합리적인 위치를 점유할 때에야 비로소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은 감각인 동시에 기술이며 시간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작품제작자로써 발견된 이 지점을 맛보는 일은 의도와 무관하게 만족감을 안겨준다. 일련의 작품들의 경우는 오브제와 설치물들이 추가되고, 때로는 독립된 입체물, 영상물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이것들은 변형된 구조물들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의 실험들이다. 이것들을 통해 물질은 형들을 더욱 외설스러우며 촉각적 양상을 띄도록 한다. 오브제의 경우 화면(구체적으로는 작품 속의 서사)과 관람공간과의 격리시키는데, 소격된 거리는 비네팅으로 인한 거리와 유사하지만 보다 직접적이어서 원시적 감각과 조우한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사소한 오브제 장치일지라도 그것을 화면과 조합해 가는 현장과정과 공간의 입체적 구성 자체의 희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간의 작업들, 도시-풍경(Cityscape),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 센토(centaur) 등은 이번전시 '조금은 너무 먼.., 바로 너머의..(A little too far.. and just beyond..)' 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의미되기를 바란다. 센토로 상징된 형태들은 직접 말하기 보다는 감추어진 은유로써 발언하며, 이 침묵의 소리는 부여받은 지위로 형성된 것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긍정적 측면에서 와해의 시도이며 존재들의 본래적 자율성 회복과 정당한 지위를 위상짓고자 하는 울림이다. 부연한다면 본인의 작업은 확정적이라고 믿고 있는 원리적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그 원리들이 미메시스된 경직되어 보이는 변형태들을 생산하고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거기로부터 '합리적'인 현실세계로의 가능성 즉, 온전한 의미의 해방된 자유와 행복을 희망하는 것이다.

 

 

The centaur_130X130cm_acrylic on charcoalboad_2008

 

 

The centaur_130X130cm_acrylic on charcoalboad_2008

 

 
 

 

 
 

vol.20081103-안상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