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권치규 조각

 

김경민_여행을 꿈꾸는 자_20x20x50cm_Acrylic on  F.R.P_2008

 

 

선 갤러리

 

2008. 10. 29(수) ▶ 2008. 11. 4(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184 | T.02-734-0458

 

www.sungallery.co.kr

 

 

김경민_신선도_30x30x40cm_Acrylic on  F.R.P_2008

 

 

김경민, 권치규의 예술적 동상이몽

 

  부부가 함께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일반인들에겐 관심거리이다. 한 가정을 이루면서 하는 창작활동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다. 물론 사람마다, 그리고 장르마다 다르기엔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같은 작가들이 부부를 이루고 살 때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고들 말한다. 특히 조각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한다. 다른 장르에 비해 공구와 시설 등이 많은 조각의 경우는 장점이 훨씬 많다고들 말한다. 그림은 대개의 경우 혼자 할 수 있지만 조각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같은 생활공간과 작업공간에서 함께 살고, 또한 같은 공구나 연장을 쓰면서도 대개의 경우 작품 세계만큼은 상이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개성이나 자기만의 표현양식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려 준다. 하기는 피를 나눈 형제조차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더 많다고 하는데, 부부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오랜 결혼생활을 통해서도 서로 동화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모습은 흥미로운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부부가 동시에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김경민, 권치규 부부 조각가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개인전이 흔치 않은 조각계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온 결과, 내용들이 익히 알려진 그들의 작업을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김경민_ 독서를 좋아하는 Elizabeth_20x25x40cm_Acrylic on  F.R.P_2008

 

 

  김경민은 여성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는 내용들을 해학적이면서도 풍자적인 구성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해 왔다. 우리 동시대의 어떤 작가도 흉내 내기 힘든 탁월한 모델링 역량을 맑은 고딕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내용들을 일기 쓰듯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표현함으로써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이다. 코믹한 연출과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모델링 감각, 평범한 소재를 섬세하고 재미있게 구성하는 상상력과 표현 능력, 극적이고 동적인 등장인물들, 회화에 필적한 만한 강렬한 색채,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운 부단한 창작 에너지.......등이 이 시대 가장 주목 받는 조각가로 부상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우리가 그동안 접해온 조각작업은 대체로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브론즈, 돌, 나무 등의 전통적 재료가 다양한 현대적 체험들을 담기에는 어진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김경민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엄숙주의 조각계에 발랄하고 참신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작품은 삽화나 동화를 보는 것 같은 경쾌하고 산뜻한 장면이야말로 엄숙주의 조각계에 활력소이자 무언가 달라진 조각의 환경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코믹한 형상을 통해 젊은 감각의 조각을 선보인 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만큼 섬세하고 감각적인 구성을 보인 작가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작품 속에 표현되고 있는 인물들이 주로 작가의 가족이다. 세 자녀의 엄마로서 가사생활과 육아의 체험들이 그대로 작품에 용해되어 있다. 온 가족을 겹치기로 업고 있는 엄마의 모습, 딸의 등교를 도와주고 있는 아빠의 모습 등 평범한 가족사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작품은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잡다한 감정의 내용들을 승화한 것들이다. 작가의 작품이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것은 단순히 코믹한 설정이나 연출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감수력이 결집된 결과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단순한 대상을 대면하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은 자신의 작업을 보다 기발하고 풍부한 교감과 메시지가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작가의 이러한 감각과 재능은 단순히 생활의 단편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구조나 관행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내용들의 작업도 적지 않다. 부유층의 허영심이나 권력 앞에서 펼쳐지는 꼴불견을 해학적으로 공격하는 풍자적인 작품들이 특히 초기에 많았다. 사실 이러한 사회풍자적 내용의 작품들은 절제와 조절이 관건이다. 자칫 방만하게 접근한다거나 성급하게 접근할 때 잃는 것도 많을 수 있는 것이 사회성이나 정치성을 담는 것이다. 다행히 작가는 특유의 순발력과 유머 감각으로 절제된 구성과 디테일로 성취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작가가 의도한 내용들을 자유롭게 표현해낼 수 있는 모델링 능력이야 말로 이러한 풍자적인 표현의 밀도를 높여주는 기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권치규_06-2

 

 

  남편 권치규의 작품 세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그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절제되고 개성적인 형식과 구조 속에 존재의 궁극적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조각은 숫제 집을 한 채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집 모양의 구조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건축적이면서도 기념비적인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전시 때마다 전시장 안에 하나의 집을 짓다시피 한 대형 작품에 작가의 표현내용이 잘 압축되어 있다.

  작가는 욕망의 존재, 즉 자연과 사회라는 한계 안에서 존재하는 보편적 동시대인의 내면을 집이라는 형상으로 상징화하는 데서부터 소통의 문을 열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인간 존재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언제나 동일한 해답을 얻는 데 주저한다. 아니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존재의 허상에 종종 시달리고 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작가는 집 구조를 다소 변형적으로 등장시킨다. 평면도상으로 거의 평면화된 마름모 꼴의 구조를 띠며, 거기에는 작가 특유의 주름질 방법에 의한 투시가 병행한다.

  집의 한 쪽 벽으로부터 시작된 형태는 주름을 따라 소실점 가까이 가면 또 다른 단면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이 두 면이 서로 마름모의 대칭상태다 보니 우리는 작품의 뒤쪽으로 가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지점 가까이서 확인되는 이미지는 사람, 나무 등의 모습들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작가는 의미심장한 존재론적 해석을 제시하게 된다. 집이라는 문명(욕망)이라는 실재를 원근법적으로 투시할 때 결국 거기에는 자연 혹은 인간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우리의 현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작가가 의미론적으로 강한 결속을 강조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투시적 공간의 거리를 통해 나타나는 변형이라는 것은 작가가 가급적 침묵하고 주저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몸소 접근했을 때 가장 진지하게 사색하는 지점으로서 독자마다의 상상력과 감정이입에 맡기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권치규_07-3

 

 

  작품마다 부여된 특유의 투시적 수렴을 암시하는 방법으로서 주름질이 대단히 독특하다. 움직임이 있는 형태의 경우는 속도감에 따른 시간의 전개도와도 같고, 정지된 대상의 경우는 투시의 암시와도 같은 것이다. 작가만의 이런 장치가 뜻밖에도 수다스런 말보다는 침묵을 더욱 요구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 주름질 효과는 평면으로만 주어진 단면과 대조를 이루면서 이미 작가가 의도하고 기대하는 것의 상당 부분을 성취시켜주는 신뢰할 만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근작에서 바로 이러한 주름질 구조를 더 발전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조의 안과 밖, 암수,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상호작용과 조합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존재)는 반드시 그것을 잉태한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그것들의 조합이나 상호작용을 몇 가지 단면들을 통해 해부학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앞면만이 아닌 뒷면도 보아야 하는 그의 작품이 이제는 바깥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살펴볼 때 절묘한 존재의 섭리를 보다 다른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안쪽을 수고스럽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일정 부분 단면 구성을 통해 작가는 친절하게 그것들을 보여주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한 번쯤이라도 사물이 보여주는 외관(사실)과 내면(진실) 간의 어떤 일련의 작용들에 주목해 볼 것을 조용히 권고 받고 있는 것이다.

 

 

권치규_11-1

 

 

 

 
 

 

 
 

vol.20081029-김경민,권치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