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빈방 III -뉴욕展

 

- 무엇에 대한 장소성 -

 

 

 

허치슨 갤러리

 

2008. 9. 8(월) ▶ 2008. 9. 17(수)

Long Island University 700 Northern Boulevard, Brookville, New York 11548-1326

주관 및 주체 : wazine.kr, exhibitonmail.com

기획자 : 김용민 | 참여작가 : 한호, 홍범, 김초희, 권종현, 이득영, 이상수, 이진준, 주상연, 이길렬, 연기백

 

 

 

이진준 |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

 

찾아가고 발견하며 확인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이가 누군가. 그는 그 뒤에 숨어 그들과 함께 고민하며 움직이고 있지만, 마치 추리소설처럼 그도 모르게 숨어 있는 발뒤꿈치에는 한 번도 깜빡거린 적 없는 눈이 있었다. 그는 매미가 우는 화창한 여름날 사람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궁터에까지 침범하여 가당치도 않은 단서를 현장에서 찾아내었고 살벌한 한 마디의 문장을 조합해 내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They see what they want.)’ 이것에 모두가 목격자였고, 모두가 현혹되어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정확하게, 그 단서는 그 단서 안에 있었다. ‘그들이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주 익숙하면서도 낯익은 곳이었으나 뜻밖에 후미지고 미처 돌려 보지 못한 장소에 각인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을 그들은 읽고 있었다. ‘보는 것’, ‘원하는 것’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이’ 단서를 숨겼고 슬쩍 건네며 숨바꼭질을 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거리의 차이를 두고 밀고 당기며 현상하는 사물의 주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설정이었다. 가까이 가면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보였다. 이는 영상이 만들어낸 상형문자였다. 일반적으로 상형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그 의미를 문자화 시킨 것인데, 영상이 만들어낸 상형문자는 화면의 범위와 거리의 차이를 통하여 대상의 시점을 비틀어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물의 작용원리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 사물의 주름이 그들의 원하는 바에 놓여 또한 그들의 눈에 포착된 사실에 있었다. 이렇듯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것 즉, 언어화 된 이미지였고 그들이 보는 것은 언어화 된 이미지의 이미지였다. 그 사이에서 교묘하게 발뺌하고 있는 주어는 복수 형태로 자리 잡았고 화면의 뒤에 숨어서 대상으로부터 텍스트가 확인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이 잠시 오는 쾌감이야말로 미감의 출처를 되짚어 보게 하였고 그것은 사물의 주름이었다. 주름의 길이와 방향은 모양과 소리를 갖고서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것을 재단하는 것은 하나의 표기였다. 영상을 통하여 'A'부터 'Z'까지의 기록은 이미지의 언어화 된 이미지의 이미지를 언어화 하는 작업으로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편집된 문장과 재배열된 단서들이 있었다. 이 단서들은 다시 숨어 있는 주어의 위치를 되새김질하게 하였다. 버젓이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역사의 중심에 인류가 있으나 인류가 역사의 흐름을 재배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곳에 있으나 원하는 바에 그들의 시선이 전회 되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본다.’ 하였다. 비단 이것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문제가 아닌 찾아가는 시선과 그것에 대한 시선의 문제였다. 주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익명화 됨, 그 시선의 화면대로 따라 움직이나 언제나 그 주어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단지, 'A'를 따라 간 익명화 된 주어, 'B'를 따라간 익명화 된 주어 등의 27개의 익명화 된 시선의 놀이에 술래잡기를 할 뿐이었다. 편집, 각색, 왜곡은 시야에 펼쳐진 또 다른 대지요, 그나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능동성이었다. 해태의 발톱에서 알파벳 'B'를 보았다. 그리고 문고리를 270°로 돌려 ‘Q’를 보았다. 미술의 범주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그러한 중턱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미지를 읽고 그들이 이미지를 보는 것은 그들이 바라마지않던 이미지의 범주가 만들어 놓은 역할극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거기서 출현된 이미지와 텍스트의 유비작용은, 주어가 주어에게 그렇게 보도록 강요하지 않고 자신이 그렇게 보았다는 사실을 원한 것에 대한 증거였다.

 

 

 

주상연 | 존재에서 존재자로

 

밤의 공간, 나뭇가지를 해치고 투명한 익명의 참여가 보인다. 모든 감각의 불안은 그런 척하기를 그만두고 ‘신비적 참여’1) 에 젖어버린다. 이른 아침 숲이 내 쉬는 수증기에 몸을 담갔다. 감각의 시야는 시원해지고 밝아지기 시작했으며 그 위치는 다른 것으로 향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감각의 위치는 존재자를 향한 존재의 소멸로 치달았고 감각의 중지와 의식의 박탈이 이행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말할 수 없음이나 보이지 않음이 아니라 존재를 목격하는 사건으로 미세한 음성을 따라가는 눈먼 자의 공포였다. 이 공포는 두려움도 무서움도 아닌 바로 여기에 무엇인가 있었고 있는 사실에 매몰된 존재의 나약함이었다. 그 나약함이 공중의 수증기에 젖어듦으로 비로서 우리의 몸은 안정을 찾았다. 여기서 공포는 감정을 넘어 부재하는 자리를 향한 부재의 자각을 일깨우는 근원적 반응이었다. 수풀 뒤로 운행하고 있는 그(거기)가 말한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2)  아무도 그(거기)를 본 사람은 없다. 그(거기)가 누구며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그(거기)는 말하지도 안았고 일컫지도 않았으며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렇게 ‘있음’3)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눈이 닫혀 있는 곳에서 귀가 잠자는 곳에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사건을 체험할 뿐이었다. 그것은 피로4)를 느끼는 순간이었고 수고로운 일의 반응에 걸쳐 존재에 대한 유죄를 선고 받은 때였다. 그래서 나는 밤의 공간, 나에게 가까운 그늘 속으로 숨어 버렸고 나를 찾는 그(거기)의 피로가 한 순간에 영원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위치는 버려졌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분명하게 말하면, 그는 거기서 지금을 성취하여 순간을 지연시키며 눈먼 자가 보이게 될 때 하나의 불빛으로 모아졌다. 이 불빛은 무엇보다 밝았고, 초점을 맞춰보며 확인할 수 있게 된 지금, 거기 대기를 덮고 있던 수증기의 흔적이 미처 흡수되지 못하고 그의 손과 팔이 되어 아이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그때(거기)에는 보이는 이가 희미하고 심히 비밀한 운행으로 스며 있었더니 부분적으로 알았고 부분적으로 예언했던 서늘한 음성이 한 지점에 서서 그의 세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제 그 어디에도 숨을 수 있는 온전한 밤의 공간이 되었다. 그 누구도 벌거벗음에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었다. 되레 그의 자리가 만족과 고백을 기술하게 하였다. 그는 말했다. ‘삶은 하나의 솔직성이다.’5) 우리가 그 빛으로 나올 때 머뭇거릴 수 있는 어둠이 있어서 그러며 그 자리에 참여하고자 한 행위(감각과 인식) 너머에 의식(ritual)의 자리가 있어서 그렇다. 이는 ‘머뭇거림의 간격’6)이라. 마치 반짝이는 새벽별이 모든 것 위에 빛나고 예술가의 영혼이 작업 아래 빛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거기서 머뭇거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를 시인이라 한다.  

1)  Emmanuel Levinas/서동욱 옮김,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 2007, 서울, p. 99 2)  이사야 35:5  3) Emmanuel Levinas, 2007, p. 100  4) Emmanuel Levinas, 2007, p. 45  5) Emmanuel Levinas, 2007, p. 70  6) Emmanuel Levinas, 2007, p. 81

 

 

홍범 | 나무의 기억 저편에...

 

'지금 여기'와 다른 세상의 정원. 대기에 씨를 심어 뿌리를 내리고 말할 수 없는 안식의 품으로, 조용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거기는 어두운가. 단지 깊을 뿐이다. 그 깊이가 한 없어 내 마음의 풍경, 별빛이 되어 빛나고 있다. 어찌나 먼 곳에서 왔던지 한 숨을 쉬고 한 번을 깜빡거려 점 하나를 찍고 기다리는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때가 진정인지 모른다. 저기로부터 오기까지 얼마나 설레였던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 그 사실에 가슴 벅차 하리다. 이는 슬플지도 그렇게 기쁘지도 않은 곳. 우리가 아주 어렸을 적 시력이 필요 없었던 때, 하나의 줄기에 연결되어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에 반응했던 시절. 정말이지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지만 내가 알았던 태고적 나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그물로 기억의 세밀한 것까지 다 잡에 매었다. 그것을 과거라 하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혹은 그렇게 되고 마는 사실을 보며 분명 어딘가에 세겨지고 너울거리고 있을꺼라는 것을. 손을 뻗어 잡을 수도 없다. 거기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지역. 문을 만들어 놓아 그곳에 우리의 눈을 맞추면 깊고 급한 시간의 덩어리가 한 순간에 잡힐 것이다. 나를 낳고 너를 옮기고 조금씩 번식해가는 별들의 눈이 착하고 순진했던 어린 소년의 꿈을 기억하고 있다. 별들이 수놓은 길을 따라가자. 조금씩 좁아져 오솔길이 되면 나무가 말하고 손짓하는 숲속에 도달할 것이다. 바람은 불지만 차지않고 숲속이 울창하지만 헤매지 않는, 그것으로 족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동산에 오른다. 점을 따라 산책을 한다. 그 길을 따라 숨을 마신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나무와도 닮았는지. 조금 아주 조금씩 생장하며 눈을 피우고 생명의 자리를 옮긴다. 어느 덧 풍경이 되어버린 나무의 발자국. 어느 새 식물들의 기억은 파릇하게 떨리며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래, 내가 살던 곳의 공터였고 내가 살던 집 뒷 동산이었다. 학교를 가고 집으로 돌아 올 때면 늘 지나치는 자리. 거기서 잎이 숨 쉬는 기억을 회상하곤 하였다. 다소 느리면 어떤가. 덜 빠르면 어떤가. 무안한 상상과 깊은 묵상에 뿌리를 내어 정념의 외출을 기대해보면, '과거 저기'에 나를 알았던 이 만날찌 누가 알까. 이렇게 빠르고 쉽게 잊어가는 '지금 여기'에 수많은 이가 에테르에 귀를 씻고 손을 씻고 눈을 씻는다. 그래도 씻겨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 건, 물에 이름을 세기고 하늘에 빛을 세기는 기억의 흔적. 그 흔적은 누군가 흑암에 바늘 구멍을 낸 것이었고 그 빛을 쫓아 오기만을 기다리는 내 안의 맑은 정신이었다. 어둠이 깊을 때 무섭지 않은 것은 그 속에 반딧불이 숨어 있기 때문이고 그 반딧불이 밤하늘을 날을 때 잊었던 옛사람을 그립게 한다. 나무의 기억 저편에...

 

 

이상수 | 제거된 시선의 텍스트

 

읽는 시선을 익명화하며 텍스트를 제거해 갈 때 여기에 남는 것은 텍스트의 틀이요, '무-의미'한  간극뿐이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그누도 묻지 않던 사선의 경계를 넘어 시선의 능력이 이렇게나 조약한지 바라보게 된다.  비어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쉬었다 가는 쉼표도 아닌 언제나 읽는 자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쇠외된 이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주관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관계하는 나의 모습을 밝힐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유연한지 않은가. 비로소 알게된 사실이라면, 정확하게 나의 독서가 언어를 도난당함으로 깊은 실음에 빠진 주체의 위치를 비추며 그렇지 않았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내용의 전달이 이루어지는 곳은 얼핏 보기에 읽고 쓰는 데 있어 보이지만 아무래도 그렇지가 않다. 분명 언어는 비어 있는 곳에 있었고 그 곳을  보지 않으면 안되는 강요의 힘에 의해 작용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빈 장소에 언어가  놓였다. 이 언어의 두께는 지극히 섬세하여 현미경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주 얇은 층이다. 그러나 언어는 어떤 빈 장소에 놓여 종이를 태우고 있는 급박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것에 정신없어 하는 우리의 시선은 논리라는  틀에 갖혀 그 틀에 매몰되어 버렸다. 시선의 해방은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그 시선은 원래의 의미를 쫓아 무게를 갖는 시선으로 스스로의 공간과 장소를 획득하게 되며 가시화 된다. 또한 그 시선은 색의 소멸을 초래하여 모든 것이 할 말을 잃은 말 이전의 상태를 재현한다. 주먹을 꼭 쥐고 힘차게 젓을 빠는 갖난 아이의 웅쿠린 몸에 겹처진 주름처럼. 얼핏 보기에 모두들 갖아 보이지만  그 주름은 제 각기여서 같지 않은 분명한 인식표를 갖고 있다. - 배아 혹은 증식, 언어의 다양함은 이렇게 발생한 것이다. - 그 인식표가 명확해 질 때, 시선의 빛 줄기가 드리워지는 때 종이를 태우지 않고 급박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는 그림자의 출현이 언어의 비어 있음을 반증한다. 결국에 그것은 긴장감으로 작용한다.  미세하게 떨리는 주름과 주름 사이로 연약한 공기가 흘러가며 장소를 간지럽힌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사물화 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거꾸로 말하면, 관심을 받아 수줍어 하는 사물의 간드러진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예민한 심성을 갖고 있으니 단지 자신의 구역에서 높게 쌓여 있을 뿐이다. 시선은 하늘로 향하며 언어는 그 사이를 활공한다. 그 뒤를 따라 바람이 이니 간극의 틈이 만들어 낸 시선의 기압의 차이라. 압력의 높고 낮은 대기의 변화가 읽기의 환경을 조정하였고 사유의 내려 앉음을 이해도록하게 하였다. 여기서 읽어내고 머리를 움직여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로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도되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말린 종이가 말리지 않은 종이에 서서 일종의 태도를 갖추고 있으니, 이는 언어 밖의 틀이었다. 이와 같이 시선의 주체는 거기에 있지 못하고 언어 밖의 틀에 서서 그 자체를 보고 있다. 즉, 시선은 '시선의 것'에 있다. 그리고 텍스트의 빈 지역을 보도록 하게 하였다.   

 

 

한호 | 한 지점에서 기억의 저편으로

 

바로 여기가 내가 있는 곳입니다. 나는 여기서 생각했고 행동했으며 관계합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렇다면 함께할 수 있습니다. 배경이 다를지라도 무언가 오고가는 마음에 내용은 같았습니다. 놀이라고 할까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쉼이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세상의 중심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합니다. 저 밤하늘의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고 땅에다가 달의 살(skin)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명랑했고 동심어린 장면이 그때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슬펐고 나도 모르게 끔찍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그때의 반대편은 늘 항상 거기에 같이 있네요. 나에게 놀이터였던 곳, 그때의 어느 날은 참혹하게 피로 난자했던 시채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시나요. 몰라도 좋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뭉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고 살아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바로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는 생생한 기억의 현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현장은 마른 진흙땅처럼 퍽퍽하고 텁텁하기 그지없는 질감의 놀이일 것입니다. 누구는 이를 구태의연하다고 말합니다. 지난 일을 되새김하려 한다고 핀잔을 줍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시대를 앞서가서 철학자가 된 미술가의 드러난 뚱뚱한 배를 사모하는가 보다.’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는 놀이의 즐거움이란 그리는 거겠죠. 그것은 흔적을 만들고 모든 있는 것들에게 시간의 주름을 안겨다 줍니다. 어쩌면 이 주름이 화가가 있어야할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술이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합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술이 삶을 비추어 한편으로는 그림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등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는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예술작품은 이성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파할 수 있다는 거 그게 살아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성은 가상에 가깝고 시간의 모태로부터 탈출한 몇 되지 않은 특별한 능력입니다. 작가가 작업을 할 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고민은 뒤로 흘렸던 수많은 그림자들의 누적일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너무나도 기본입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 서 있는 한 작가는 미술사에 불편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랫동안 그의 놀이였고 전문가들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즐거움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랬다하더라도 말이죠. 이제 그 즐거움이 벽을 떠나 여기저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지점에서 기억의 저편으로...

 

 

이득영 | 한강프로젝트 Ⅱ - 25개의 다리

 

사람이 저 하늘에 별(인공위성)을 심었다. 그 별은 우리가 만든 좌표에 걸려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그 곳에서 우리를 본다. 애초부터 거기엔 우리와 같은 눈이 없었다. 단지 정보만 있을 뿐 투명한 수정체와 유리판이 파손되지 않는 이상 그 기능을 다할 것이다. 시선의 각도가 수평에서 완전한 수직이 될 때 사람의 눈은 그 인격을 상실하고 모든 작용의 멈춤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지체되는 시간도 간섭하는 공간도 없는 완전한 ‘마주섬’으로 직면할 뿐이다. 이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우리의 얼굴을 ‘마주섬’으로 보게 될 때, 그 지점에서 감각의 ‘멈춤’과 ‘낯섦’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곧 완전한 ‘마주섬’은 감각의 ‘멈춤’과 ‘낯섦’이다. 이 현실은 전혀 초월하지 않고 단지 숭고할 뿐 과학과 역사가 정리된 아카이브(archive), 도시를 밝히는 데 서 있다. 수많은 정보와 정보를 통해서 구축된 도시의 진행은 그 자리를 떠나 수직을 이루는 곳에서 모든 것이 적나라케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멈춤’은 사선의 정지로 모든 사선의 역에서 피할 길 없는 부동의 직선이다. 그 어떤 것도 대기 중으로 뜀박질 할 수 없으며 심히 촘촘한 그물망에 고착되어 버렸다. 이는 즉시 ‘낯섦’이 되어 온전한 거리두기가 확보되는 시점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객관화다. 여기서 객관화는 얼굴이며 가장 특징적인 위치 파악이다. 그 누구도 이 상태에 놓여본 적이 없었으며 얼핏 그 자리를 지날 때 어색함으로 궁색해진다. ‘낯섦’은 객관화 안에서 객관화하고자 하는 주체의 시선으로 자리 잡는다. 그 장소는 바로 우리가 만든 눈(카메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눈 - 보고자 하는 방식 안에서 보고자 하는 우리의 눈에 위치한다. 그것을 정확하다고 판단하며 유일하고 객관적 지식으로 ‘거기 있음’을 넘본다. 존재에 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신화에서 탈출한 개념화 작업(좌표작업)이다.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떠나 하늘의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안구에 낀 수많은 층과 안개를 걷어낸 순간에서 시선의 자유낙하다.  오래전부터 과학과 역사는 중력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고 물리학에 속하는 그 어떠한 것도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이 개념화 작업은 떨어지는 그 자리와 다음 자리의 이동에서 그어진 선분의 경로로 설명된다. 다시 말하면, 개념화 작업은 ‘무엇으로 한 지점과 한 지점을 이을 것인지’라는 매체(기술) 발전의 역사와 만난다. 이는 지구의 역사로 볼 때 진화하고 발전한 질료의 지적 획득 작용이다. 거기서 인간은 가장 탁월하게 진화했으며 거대한 포획물을 질서 있게 담을 수 있는 어항을 이룩하였다. 이 질서는 한편으로 자연의 능선을 따라가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길의 개척(다리)이라는 개념화 작업물로 함축된다. 그 고밀도는 단단하여 무게를 갖는 실체가 되었으며 존재의 위치를 질문하고자 하는 미적형식을 취하는 선분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즉, 존재의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미적형식은 피어나고 있으며 그 한 점은 촉감에서 다른 한 점은 계획되고 계산된 길의 흐름에서 점과 선과 면이라는 조형언어로 이행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다져진 인간의 기억이 최소한의 지점을 선택하므로 정비된 도시를 명확하게 보고자 하는 데 있어서 반듯이 수반하게 되는 미감의 영역이다. 이제 ‘지금 여기’는 ‘바로 그 지점’으로 이행되었으며 눈과 그 지점이 일치하는 곳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현실의 가상(작품)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연기백 | 푸줓간의 티셔츠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대서양 어디인지 모를 자욱한 안개가 낀 무인도에 난파된 해적선의 깃발, 지하세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헤파이스토스의 망치질 소리, 그래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지 그 소리에 핏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분명 소리의 눈은 그 한 복판에 서서 공간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동을 암암리에 도모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소리는 새의 날개가 되고 거미들의 먹이가 되어 공중 한 지점에 올라 완전히 파헤쳐져 바람의 저항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시체의 표본이 되었다. 그렇게도 살벌한 짐승의 발톱이 무수히 갈퀴고 물어뜯은 거친 숨소리가 뜨거운 김을 내며 대기 속에 잠자는 수증기를 얼려 버렸다. 거기에 소리의 색깔이 발견되었고 그 색은 깊은 반전이 숨어 있는 고동색이었다. 이 반전은 소리가 수많은 세월을 지켜보면서 손가락의 지문처럼 나무껍질 속으로 자신의 눈과 입을 숨겼다. 그 변화는 너무나도 느려서 우리의 조상의 조상이 되는 최소의 사람에게로, 겹겹이 누적된 나무 등껍질의 흔적을 쫓아서 말이다. 그것은 고동색이었고 또한 고동색이었는데 그 깊이가 시간을 잠재웠고 그 넓이가 공간을 꿰뚫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색은 압축된 소리의 얇디얇은 판으로 시간의 단층을 시간의 단층으로 밀어 넣으면서 두드리는 쇠망치가 그 때의 공간을 그 판 속으로 세기고 각인시켜버린 숨죽인 노동인 것이다. 말없는 노동, 이것은 결국 자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자기몰입이요, 자신이 자신에게로부터 벋어나는 자기탈출이다. 단지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과 희미한 지문만이 그때의 그 충격을 기억하고 있었고 무엇을 다음으로 넘겨야할지 아니면 함께 저변으로 굳혀져야할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노동은 역사성의 굴레를 전혀 외면하지 않은 채 가장 기본의 태도와 겸허한 자세로 헝클어진 타래를 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행위가 무(의)식할 수 있지만 무(의)지하지 않으며 무(표)정할 수 있지만 무(표)현할 수 없다. 고요한 와중에 시작과 끝이 있으며 무엇이 우선되고 무엇이 나중 돼야 하는지 그 노동 속에 그 지문은 속히 알고 있었다. 즉, 지문은 가시화된 비가시성의 설명할 수 없는 ‘존재성이 존재적’ *범주에서 피어나오는 고유한 개별성으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그 현실성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 미적이념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노동하는 이의 손을 떠나 공간의 가득 찬 곳과 비어있는 곳을 아로새기며 방향의 기준을 파괴하고 산과 계곡을 전복시킨다. 조각칼로 깎은 자리 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으면서도 물질의 무게가 여전히 담겨 있는 것처럼 숨을 담은 컵과 같다. 작가는 그 잔에 자신의 머리를 숙이며 아무런 각주를 달지 않고 자신의 손에서 숨을 마시고 내뱉으면서 그 속에 ‘숨’은 그림자의 존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비어 있는 존재성, 작가로부터 왔고 작가로부터 떠난 비어 있는 존재성은 지고지순한 신의 영역을 거론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한 있지 않음에 대하여 깊은 응시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단지 행위하고 있다는 것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마찰하는 경계의 지점이며 궁극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틈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소리다. 작가는 그 간극을 조정하고 운행하는 역할에 서 있고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미적행위다.

이로써, 연기백의 작업은 공간에 내러티브를 흘렸다.

 

 

이길렬 | 풍족한 시선의 낚시질

 

여러 가지 소품들이 공간에 붙어있다. 우리가 설치될 공간에 들어서게 될 때 마치 딱정벌레나 누에고치들이 나무등줄기와 숲 바닥에 즐비한 것처럼 그 울림소리를 듣게 된다. 또한 그 소리에 공간은 즐거운 휴식처 혹은 채집 장소가 된다. 이 장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도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기도 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보고 있다는 관객의 시선이 설치로 마무리된 공간을 보면서도 공간은 관객의 시선으로 선택되도록 요청하고 있다. 물론 처음 이 장소에 들어서게 되면 미적인 장소성이라는 공간 전체로 시선이 흘러간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은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제시하고 스리슬쩍 들춰낸 작은 형태들로 유도된다. 이것은 즐거운 술래잡기이며 먹이감이 풍족한 바다에서의 낚시질이다. 무엇을 취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포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즐거울 수 있는 것은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에 ‘있다’는 것은 발견되는 것이며 발견되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을 때 즐거움은 출현한다. 갤러리라는 미적공간에서 봤을 때 이 공간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미적공간 이전의 공간이거나 아니면 미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가시화 되는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갖는다. 하나는 우리가 보고자하는 적극적인 시선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숨겨진 가시화된 세계이다. 숨겨진 가시화된 세계라는 문맥이 다소 모순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하이데거의 말에 빗대어 현상에서 현현하는 은폐되어 있는 존재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방향성이 일치하고 서로 마주치게 될 때 고유한 존재성은 들어나게 된다. 예술에서 이것은 예술작품이며 미적공간이다. 특히 미적공간이란 현존하는 동일한 공간에서의 실재적 체험이기 때문에 더욱더 현장성이 부각되는 현실성을 갖는다. 이 지점에서 다시 각각의 부분들과 공간들의 관계를 살펴봤을 때 각 개별들은 작가의 손에서 주워지고 재조합된 조형물로 ‘유기적 숨’을 내쉬게 된다. 그 숨소리를 듣게 될 때 보는 이는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규칙성이란 논리적이고 정형화된 질서로서 시선의 흐름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연의 굴곡이다. 좀더 설명하면 사방에 널려진 색색거리는 모양들이 우리의 감상방향을 흐트러트리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작품대로 살고, 공유하고 있는 공간은 미적체험을 보전하게 한다. 이처럼 이 설치작품을 통하여 혹여나 우리의 의식이 투영된 세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에서 그것이 전부인양 아니면 예술이 이러한 세계관에서 설명될 수 있는지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분명한 구분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혹은 작품이며 작품을 공유하는 예술공간 그리고 거기서 작품을 보는 관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러한 구분과 예술유통과정은 지극히 단편에 불과한 것이며 관객이 작품을 취하는 행위가 작품을 제작하는 전위된 행위로 탈바꿈 되거나 미적인 공간이 작품화된 공간으로 되는 것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성을 살펴보게 한다. 즉 우리가 본다는 것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원한 것이기도 하겠으나 원하도록 한 세계의 펼쳐짐과 확장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먼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권종현 | 오브제를 통한 개인과 사회

 

바닥을 굴러다니고 하찮기 짝이 없는 조각난 헝겊과 종이들 그리고 반짝이, 스팽글 같은 액세서리들 이들은 작고 조각나 사람들의 손에서 쉽게 버림받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모여지고 쓸어 담아 풀로 붙이고 꿰매고 바른다. 조각난 이들은 캔버스에서 서로를 만나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지붕은 파랑색 헝겊으로 벽은 골판지로 창문은 반짝이는 pvc거울로 기존에 있었던 시멘트와 콘크리트, 유리로 만들어진 높은 빌딩과는 다른 세련된 골조가 아닌 어쩌면 버림받았던 소외의 저항으로 보란 듯이 그들은 새로운 도시를 개척하였다. 이 도시는 상하의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머리가 될 수 있고 발이 될 수 있다. 정말이지 세상이란 중력이라는 것으로 우리의 시각을 질서화 시켰고 중력에서 벋어날 수 없는 강력한 접착제가 발라졌다. 그런데 우주라는 곳은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에 관해서는 무의미하며 서로와 서로의 관계어서 얼마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행성과 행성은 충돌이 없이 지금까지 우주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의 지평이 조금 더 확장된다면 쓰레기통은 없을 것이고 있다하더라도 버림이 없는 재생산의 길로 갈 것이다. 사회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는데 언젠가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왕을 뽑고 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침략의 서사가 시작되며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나의 조화를 위하여, 하나의 내용을 구성하는 작품으로 오브제들은 취하여졌으며 제한되었고 어떠한 법칙이라는 것이 생겨 철저하게 제단하고 내용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거기서 발생한 개인의 개성과 고유한 존재성들은 국가라는 법에 의해 통제되고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 사형이라는 제도를 진화시켰다. 더 이상 개인은 고유한 유일한 존재가 아닌 소외되고 잃어버린 타인 속에서만 발견되는 외로운 개인이 되어 버렸다.  권종현님의 작품은 수많은 오브제들로 이루어졌는데 이 오브제들의 조각들은 매우 작아서 쉽게 잊혀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있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오직 한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지성소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오브제들은 집이 되었는데 캔버스를 돌려도 상관하지 않는 집이 되었다. 이 집은 혼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각각 다른 오브제들이 겹치면서 만들어 진 것으로 어느 하나 소외됨 없이 각자의 빛을 발하며 웃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사다리가 보이는데 이 사다리를 통해서 상하의 구별이 파악된다. 사다리는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이며 기대이다. ‘꿈의 마을’ 이것이며 작가가 바라는 세상은 누구도 버려질 수 없고 모두가 하나의 꿈을 갖으며 그곳을 향에 함께 달려간다.

 

 

김초희 | Come Into Flower

 

반짝이는 진주가루 눈물에 묻어 반투명 아른거리는 통에 있다. 무엇을 보관하려 했는지 무엇을 간직하려 했는지 그 임자는 빛에서 온 무지개와 가냘픈 적동(赤銅) 안으로 이를 밀어 넣었다. 시간은 흘러 세월이 되고 공기의 요철이 매끈한 물질을 뒤덮을 때도 이 안은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길들여지고 있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닮아가는, 아니면 하나로 섞여가는, 그래서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모가 깎이었다. 어쩌면 찬바람을 피하고 피해 여기로 왔고 발갛고 여린 맨살이 되어 깊은 잠을 자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저곳으로 나간 잎을 보거라. 여기처럼 틀이 없으니 스스로 동(銅)을 입었다. 그 가벼움은 무게를 갖고 그 모양은 한 방울의 눈물로 고착되었다. 생각해 보자. 꽃잎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 않고 멈춰 서게 되었다는 것을... 어디나 할 것 없이 사물로 전락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언제가 우리에겐 말랑말랑했던 감정이 흘러내린 적이 있었고 그것이 아쉬워선지 미련이어선지 하나의 애틋한 사물이 되었다. 그 후 나와 그 사물 사이엔 막이 쳐졌고 실체의 잔상이 막으로 번졌다. 그리고 오로라가 되었다. 무지개의 섬광을 테두리에 두고 실체에 조금 떨어져 사방에서 교차가 되어, 급기나 나의 시선을 현혹시키기까지 한다. 그것은 아우라가 아니었다. 단지 오로라였다. 사물로 온 입자가 대기를 이온화 시킨 단순한 잔상에 불과한 오로라였다. 우리가 안타까워했고 애틋해했던 감정이 사물에 대상으로 교차하는 곳에서 배출되었고, 시야에 맞닿고 교란시키는 간극에서 힘을 잃었다. 더 이상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감정으로가 아닌 망막에 얼 맺힌 상의 착각된 놀이였다. 이 놀이는 지각과 정념의 자유로운 유희로 장소의 냉정을 잃지 않는다. 누구나 어둠 안에 하나의 빛이 비춰진 무대에 서 있다. 그 무대는 깊고 신중하여 침착하고자 하는 태도로 가득하였다. 이는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정화의 장소요, 지극히 개인적이고자 했던 사심(私心)이 읊조린 시적인 공론의 장소였다. 과연 꽃에서 떨어져 나간 꽃잎 하나가 한 사람의 마음을 긁기 시작하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허공에 달려 나의 잔상들과 함께 대기 중으로 휘발시켜 버려라 하였다. 그리고 아름답다 한다 하였다. 비로소 미적정서가 여기에 싹텄으니 그것은 시적형식의 눈물로 된 사물이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한 단어 한 문장 이들이 시각화 된다는 것은 무게를 취하는 이미지의 내러티브요, 요술과도 같은 예술의 일루전과 다르지 않다. 궁극적으로 이는 정념(pathos)의 제현의 문제로 소급되니 과히 미적정서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실체는 없어야 한다. 바로 그곳이 예술과 우리가 관계하는 지점이니 참으로 시선을 동요하는 미술의 무한한 힘이라. 언제나 감정처럼 미술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 주변에서 선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대기를 실컷 들이마시며 다시 내뱉는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단순한 정서나 분위기로 그치지만 그것을 제어하고 조절하기 시작할 때 미적정서로 우리는 정화된다. 이곳은 꽃잎이 눈물로 봉인된 여성의 섬세한 손가락과도 같은 감옥이어라. 누군가 감옥을 거듭남 혹은 성장의 장소라 하는데 대상이 변하여 사물이 되었고 사물이 변하여 시적장소가 되었다. 그 사물은 우리에게로부터 온 사적인 감격의 혼합된 이미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던 카타르시스1), 이처럼 조형예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감격의 기념처라 할 것이다. 한 목동이 한 묘비명을 읽는 푸생의 작품처럼2) 문학적 감미로움이 ‘여기 미술공간에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꽃잎이 떨어진다는 쓸쓸한 사건일 수도 있으며 그것이 눈물이 되어 감정을 부여하는 하나로 이어지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술공간은 ‘만들어지고 설치된 사물들’3) 로부터 온 섬세한 미감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1) Aristotle/천병희 옮김, 시학, 문예출판사, 2000, p. 47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언급하면서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관한 감정의 이행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행은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감정이 유발하는 되는 곳에서 감정이 유발되는 곳까지 감정이나 정서, 정념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처럼 문학이나 예술은 감정이 감염되고 전달되어 결과물인 작품과 함께 환기된다. 무게를 갖는 시각미술에 적용시켜 봤을 때 대상이 되는 오브제, 사물은 시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시적인 형식이란 플롯(p. 49)으로 사건의 결합이다. 꽃과 눈물의 이미지가 겹친다는 것, 이것은 사건의 결합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신화의 내용까지 끌어드릴 수 있다. 2) Nicolas Poussin, , 1638.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에는 문학적인 내러티브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묘비명에 쓰인 라틴어의 문자이며, 그 두 번째가 그것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목동들의 제스처다. 이처럼 작품 속에 서사시와 희극, 비극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은 매우 문학적이며 시적이다. 이러한 미술형식은 낭만주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며 자연과학적인 측면에서 접근되기 보다는 시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이라 하겠다. 지금의 미술과 관계하여 이러한 문학적인 시각화는 미술사의 도전적이고 문제적 측면으로 접근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좀 더 구체화시켜 시각작업화와 문학작업화의 간극에서 떨리는 미적시선의 갈등이 관객의 감상태도에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도전적 시각은 이 작업에서 세 가지의 형식으로 유추되기에 이른다. 그 첫 번째가 눈물과 꽃잎 등의 이미지들이 하나로 겹치면서 나온 ‘만들어진 사물’이다. 두 번째가 빛이 ‘만들어진 사물’을 비춰 필름에 맺힐 때 발생하는 흔들거리고 번진 잔상의 이미지들이다. 마지막으로 브론즈로 제작된 ‘만들어진 사물’과 적동으로 된 원형의 틀 그리고 그 안에서 위치가 조정되는 설치의 방식에서 오는 시적인 형식 즉, 플롯의 방식(사건의 결합)이다. 3) 이 작업에서 ‘만들어지고 설치된 사물’의 의미는 단순히 이미지화된 오브제 혹은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시가 함축된 정제된 가공물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작업이 작가에게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 작업이 여전히 작가의 심중에서 부유하고 있어서, 미적이다고 할 때 미적정서나 감성을 건드리는 미적오브제의 측면을 보여준다.

 

 
 

 

 
 

vol. 20081010-이방인의 빈방 III - 뉴욕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