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 개인展

 

- 조각난 일상 -

 

플라스틱 의자 II_3x1x1m_2004

 

 

갤러리 쿤스트독

 

2008. 9. 17(수) ▶ 2008. 9. 25(목)

openning : 2008. 9. 17(수) pm 5 : 00

110-034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02-722-8897

 

www.kunstdoc.com

 

전체내용은 3파트로 구성 됩니다. part I- 기능의 상실   플라스틱 의자 I, 플라스틱 박스   part II- 비틀린 일상 플라스틱 의자II, 플라스틱 탁자, 진열대, 자동차I, 자동차 II part III- 기계의 진화 현대인들의 삼원색에 관한 착각, 진화를 향한 몸부림, 흐르는 물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플라스틱 탁자_1.5x1.5m_2004

 

 

조각난 일상

 

김용민 | 쿤스트독 갤러리 큐레이터

제품의 기능성이 상실되는 때, 제품의 맹아(盲兒)가 태어났다. 그 자리는 비었고 인간의 몹쓸 간섭이 그쳤다. 그들의 본적은 공장이었지만 지금의 거주지는 사물이었다. 이제 사물로 취하게 된 공간은 도구화 되지 않고 사사로운 필요성에 단절을 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공된 사물이라는 점이 찔려 기능성을 의식하게 하는 옷을 벗지 못하였다. 이것이 원래의 사물과 구별되는 것이었고 기능의 상실에 작가의 개입으로 진정성이 부여되는 시점이었다. 모든 것은 그 고유한 제품의 의도에서 어긋나게 되었고 무엇 무엇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무엇인가 비틀어진 일상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제품이 스스로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될 때 그들의 몸에서는 뼈가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이 뼈는 성장이자 거부며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 뼈는 살로부터 뻗어 나온 게 아니라 철칼의 난도질로 뻗혀 나온 몸체들이었다. 분명 외부 누군가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모든 골조를 들어내며 한 뼘의 공간도 허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작가와 사물과의 위험한 놀이라. 그 처음, 기능의 상실을 맛보고 난 후 그 둘의 장난은 난폭하면서도 매혹적인 이끌림으로 자극하고 있다. 제품은 자신의 눈을 뜨기 위하여 작가의 손을 빌렸고 작가는 공간의 미적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제품의 구조를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보면, 비틀린 사물의 골격이 공간 기능의 상실을 연쇄하게 하여 공간이라는 것 역시 사물의 원형이 상실됨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접근하기 힘든 그 곳, 장소의 놓침이 알량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누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한다 하였지만 케이블타이로 재봉된 온 몸은 상처뿐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의 위험한 시선이 변화의 조짐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조짐은 기계의 진화였다. 어떤 측면에서, 진화는 돌연변이의 역사다. 환경과 조건의 마찰로 발생된 수많은 서사의 이야기들이 사물의 상실된 자리에서 가시화 되고 있었다. 스스로의 내용을 시각화 하는 모습이 우리의 눈총을 의식한 채 어떠한 구조와 조합이 우리의 눈과 입을 흥분시키게 하고 있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 대상은 인간 최대의 발명이라 할 수 있는 플라스틱과 철의 구조를 재조합해 가기 시작하였고 ‘불편한 유쾌함’으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낯설게 되었다. 그 후, 우리의 역할은 멜랑콜리(躁鬱病)하게 되어 나긋해진 그 장소의 발칙함에 약간 아찔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상실된 기능은 다른 기능으로 전이되었고 뒤틀린 사물의 메커니즘이 그 장소를 어색하게 다른 한편으로, 불쾌하게 하였다. 이렇게 거기는 버젓하게 조각난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술공간은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고, 상실되고 틀어진 일상의 공간이지 않은지. 거기서 그 무슨 섭생의 유익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미술공간의 필연성은 일상에 대한 곡해와 메커니즘의 전이로 저들의 장소를 꾸리게 되었다. 그 근원이 사물의 욕망에 있었다. 엄밀하게, 이 욕망은 스스로 진화되어 인간사의 부조리와 모순된 구조를 꼬집는 것에 있었다. 더 근원적으로, 그것은 미술공간으로 소급되었다. 그 문을 들어섰을 때 모든 바깥 것은 공간에 포섭되었고 입이 봉해지게 되었다. 기계가 진화한 모습을 목격하고 처절하게 무기력해진 관객의 위치에서 ‘조각난 일상의 전시됨’의 이유가 밝히 드러났다. 그것은 일상과 구별되어 미술공간만이 갖는 고유성이었다.

 

이렇듯, 정승의 작업이 쿤스트독에서 전시하게 된 명분을 취하게 되었다.

 

 

자동차 I_9x8x2m_2006

 

 

자기 파괴의 충동을 지닌 돌연변이 기계

 

이선영 | 미술비평

전시장 한켠에서 복사기가 돌아간다. 복사기의 안쪽 부속품들이 쏟아져 나온 상태인데도 작동되고 있으며, 혼자서 불빛을 내며 무엇인가를 끝없이 스캐닝하고 있다. 내장처럼 쏟아져 나온 부속품은 빨강, 파랑, 노랑색이 칠해져 있다. 부수어진 기계는 케이블 타이로 다시 연결되어 있는데, 기계 표면 위로 뻗은 수많은 케이블 타이들은 마치 짐승 가죽위의 털처럼 빽빽이 붙어있다. 그것은 산산조각 나기 일보 직전의 몸체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남은 여력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려는 듯하다. 작품 [현대인들의 삼원색에 관한 착각]은 복사기 안에 세 가지 색상의 잉크가 들어있다는데서 착안한 것이다. 그 삼원색의 조합에 의해 수많은 색이 재현된다. 그것은 극소수로 한정된 코드가 유일한 기준이 되고, 그것들의 조합 및 무한 재생산에 의해 세계의 다양성이 제한되는 상황을 표현한다.

부수어진 기계의 몸체를 잇는 케이블 타이는 손쉽게 조여 주는 역할을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딱 한번만 사용될 수 있다. 정승이 다른 작업에서도 많이 활용하곤 했던 케이블 타이는 단순히 재미난 형태를 연출하기 위한 방편이기 보다는, 편리함, 일회성, 조이기, 일방성 등의 성질을 통해 현대 문명이 가지는 본질적 면모를 압축하는 소재이다. 대상과 대상이 이음매도 없이 연결되는 ‘컨버전스convergence’ 시대에 작가는 조각난 대상을 누더기 깁듯이 잇는다. 디지털 부문에서 활용되는 융합 기술을 덩치 큰 아날로그 기기에 적용함으로서, 가시적 효과를 극대화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끌어 모아 한 평면에 놓고 압축시키는 것은 기술의 바로미터가 되어 새로운 가치(이윤)를 창출하곤 한다. 압축 또는 종합은 종종 과도해져서 부조리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데, 정승의 누더기 기계들이 상징하는 바가 그것이다.

 

 

플라스틱 의자_1x0.5x0.5m_2004

 

 

이 기계들은 각각이 가진 기능과 독특함으로 진가를 발하기 보다는, 맹목적인 융합을 통해 모든 존재가 엇비슷해지는 상황을 만든다.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추기 위해 많은 물질과 에너지가 집약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 비슷해진 존재들이 동일한 평면에서 무한경쟁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성의 공존과 평화가 아니라, 권태로움과 전쟁을 낳는다. 작품 [흐르는 물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샤워기와 변기를 결합시킨 것이다. 하얀 타일이 깔려 있는 변기 아래가 깨져있고, 그 조각들 사이로 쏟아진 물이 고여 있다가 모터에 의해 순환된다. 변기와 샤워기 사이를 순환하는 탁한 물은 씻기와 배설물 처리를 결합시킨다. 그것은 어쩌면 배변과 목욕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중의 씻어내기라는 행위를 통해 위생에 대한 현대의 강박관념을 표현한 것이며, 한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발상이 극단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껴진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또 다른 소비와 생산의 광란일 뿐이다. 이 기계는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순환 주기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짧아지고 있음을 예시한다. 두 대의 선풍기가 얼굴을 마주대고 작동되는 작품은 융합의 부조리성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작품 제목처럼 ‘진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머리가 붙어있고 몸이 서로 꼬여있는 두 대의 선풍기는 회전 모드로 맞추어져 있어 거슬리는 소음을 내면서 계속 뒤틀린다. 서로 붙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두 개체가 한데 얽혀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어떤 상상속의 괴물 못지않게 섬뜩하다. 복사기, 선풍기, 양변기 등이 활용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작가가 수년 째 실험하고 있는 돌연변이 기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모두 최초의 대상이 가졌던 기능이 변형된다. 생존을 위한 진화는 생물 뿐 아니라, 기계에도 적용된다. 자연에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지는데, 거기에서 과도적인 존재들인 돌연변이가 태어난다.

그 중 극소수만이 경쟁력 있는 새로운 종으로 분화한다. 인간의 예술적, 과학적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 역시 자르기와 다시 잇기 라는 기본적인 방식을 가진다. 작가는 개체 뿐 아니라 환경을 대상으로 하여, 공간에 가벽을 만들고 그것을 부러뜨려 다시 잇는다. 통상적으로 융합이나 집중은 생산력의 향상을 위한 것이다. 한 대의 자동차나 컴퓨터가 생산되기 위해 수많은 부품들이 집중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노동력과 잉여가치(부)의 집중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동기와 행위를 생산력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수렴 시킨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고 같은 것을 욕구하도록 한다. 집중과 융합을 통해 대량 생산하고 이를 대량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욕구의 획일화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의 획일화는 풍요 속의 빈곤을 생산할 뿐이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무분별한 융합에는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내재해 있다.

 

 

현대인들의 삼원색에 관한 착각_2x2x1.5m_사무용 복사기, 케이블타이_2008

 

 

분열된 기계를 깁는 행위는 연결 부위의 실밥을 드러내고 틈을 벌리는 행위에 가깝다. 균열을 노출하면서도 그것들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승이 사용하는 기계나 기구들은 대개 기능에 충실한 산업 생산물들이다. 선풍기, 변기, 샤워기, 복사기 등의 대상은 아무런 장식도 군더더기도 없이 그것의 목적을 위한 형태들을 가시화한다. 원래의 재료들은 ‘형식은 기능을 따르는’ 기능주의적 사물이며, 기능에 대한 기호를 가진다. 하나의 기능으로의 환원은 그자체가 끊임없는 제거와 융합의 결과물이다. 현실 속에서 기능들끼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더 나은 기능을 위한 것이며, 자본의 조절과 관료적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정승은 케이블 타이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분리된 기호들을 결합시키는데, 이는 산업 현장이나 시장에서 이윤을 위해 늘 상 이루어지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서 기능의 배가를 위한 공장과 시장의 실험들의 부조리한 면모가 극대화 된다. 작가가 고안한 새로운 기계 혹은 기구들은 기능이나 생산의 향상이 아니라, 자기모순과 자기파괴를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하다. 그는 기능주의의 언어를 조금씩 비틀어 기능을 초과하는 몫을 드러낸다. 본래의 기능이 변형되었지만 멈추지 않고 쉭쉭거리며 계속 작동하는 정승의 기계들은 욕망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을 동시에 연상시키며, 양자는 ‘욕망하는 기계’로 수렴된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한 책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장이 나며 고장을 일으키면서만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때 욕망하는 기계들의 고장은 그 작동 자체의 부분을 이룬다. 욕망은 기계요 기계들의 종합이요, 기계적 배열이다.

 

 

흐르는 물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_ 2.4x2.4x2.5m_혼합재료_2008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기계는 연속체의 힘을 구현하며, 어떤 부품이 다른 부품과 연결된다. 통일성을 향하는 것은 근대적 이성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성은 근대적 계몽의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만프레드 프랭크는 [현대의 조건]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이성은 통일성을 지향하는 힘이다’라고 말한 이래, 이성적 판단의 근본 성질은 사고의 필연성, 보편성, 합법칙성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성은 개인적인 열정에 대해 일반의지의 합리성을 대립시키면서, 과학적 논증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 사회적 형식들을 백지화했다. 이성은 보편주의의 근거가 되었으며, 현대성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의 긍정적 이미지에 의해 완성되어야 했다. 근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포괄하려는 동일성의 사유가 확립된다.

그것이 생산과 소비, 소통(유통) 체계와 맞물리면서 표준화 되었다. 도처에서 합목적성과 효율성이 구가된다. 그러나 진보는 인간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도 부품으로 활용되는 익명의 구조가 유지되고 확대 재생산되는데 필요한 것은 아닌가. 정승의 작품에 나타나는 부조리한 기계들은 인간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거기에서 합리성은 부족하거나 초과된다. 그것은 근대의 이성이 밟아온 궤적과 같다. 이성은 투명하거나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라, 욕망 및 권력과 얽혀 있다. 정승의 작품에서 기계들의 기능은 최초의 투명한 의미와 기능을 잃고 변형된다. 그러나 그 변형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 그것은 근대예술처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가진다. 그것은 도구화된 이성이 인간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으로 치닫게 해온 자본주의 사회의 숨겨진 비합리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비합리성에서 해방의 계기를 보는가, 아니면 억압의 계기를 보는가는 관객의 관점에 달려있다.

 

 
 

 

 
 

vol. 20080917-정승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