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웅 기획展

 

- 진리와 욕망 -

 

Ecstacy_2008_oil on canvas_53x45.5cm

 

 

쿤스트독

 

2008. 4. 11(금) ▶ 2008. 4. 24(목)

서울시 종로구 창서동 122-9 | 02-722-897

 

www.kunstdoc.com

 

 

Jim_2007_oil on canvas_130.3x194cm

 

 

기획 : 정용도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현실의 과도한 억압적 상황에서 벗어나 깊은 무의식의 심연으로의 복귀 혹은 원시적 언어상황으로의 복귀를 인간의 정신병적 징후로 해석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로 프로이트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라캉은 욕망―여기서의 욕망은 원형적인 것이다―의 거세가 정신병적인 상황을 초래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학자의 두 가지 견해를 대하고 있지만 정신병적 상황으로의 전이가 분명 현실에서의 억압적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억압은 소통의 불가능성, 한 개인이 수용하기 힘든 특정한 사회적 체계 등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우리 삶의 대상이자 인간들이 자신의 삶을 그려 나아가는 캔버스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의 많은 구체적인 사건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삶의 다른 측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적이든 혹은 개개인의 욕망에 의해 발현된 상황이든지 간에 우리 삶을 억압하는 비효율적인 기제들(mechanisms)로 작용할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여기서 억압은 긍정성 혹은 부정성을 지닌 원인이라는 차원과는 관계가 없는 삶의 실존적인 문제이다.

 

 

Madame 미숙_2008_oil on canvas_162x97cm

 

 

남대웅의 이번 전시는 그의 작가로서의 입장을 라캉적인 의미에서의 ‘욕망’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 등 여타 다른 장르들의 최종 생산물로서의 예술작품은 개인으로서의 예술가의 삶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투영의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다면 작가적인 행위의 결과물인 작품들이 예술적인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거나 혹은 심지어는 예술작품이라고 불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적인 차원의 문제들이 인정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그것이 개인적인 가치든 혹은 보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가치들과 관련하여 예술작품의 본질이 드러내는 철학적 문제들(philosophical problems)에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예술적인 문제들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작품으로 구현된 의미의 철학적인 존재론적 근거들을 향한 개인적이자 문화적인 욕구와 관련된다. 남대웅에게 현실은 욕망이 확장되어야 하는 장(field)이다. 그에게 현실의 예술적 상황이 요구하는 미학적인 규정들은 욕망이 거세된 현실의 대응물(counterpart)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욕망이 예술가에게는 미학적 원형의 개념으로 생각될 수 도 있다. 남대웅의 이번 작품들이 그의 예전의 작품들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미학적 전통의 경계를 넘어 그 자신의 욕망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즉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향해 무엇인가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Marilyn 보희_2008_oil on_canvas_162x97cm

 

 

남대웅의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여배우들 혹은 성인 영상물의 여성 이미지들이다. 미술사적인 면에서 여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생산적인 의미와 관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원형으로서의 어머니 혹은 성녀 마리아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거리의 여성으로서의 이미지 혹은 세속적인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환경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앞에서 말한 듯이 두 가지 면으로 정확하게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영화나 TV 속에서의 다양한 역할은 배우의 개인적 삶의 태도를 넘어 하나의 캐릭터로서의 전형성을 창조하고, 그렇게 창조된 캐릭터들은 삶의 현실적 경계들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삶과 이미지는 하나의 통일적인 삶의 아우라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일반 관객들과 여성들의 이미지가 맺는 관계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성을 맑은 고딕으로 형성되는 시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크시대 조각가인 베르니니의 성테레사의 엑스터시 중의 얼굴 부분만을 취해 그린 <Ecstasy>는 전형적으로 미술사적인 면에서의 여성의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테레사는 신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는 순간의 엑스터시를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현실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물론 또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본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형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를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징적인 구조는 현실의 개입으로 인해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변화된다. 19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원작으로 1956년에 제작된 영화 <자유부인>의 여배우를 그린 작품인 <Menthol>을 통해 작가는 현실의 여성을 상징적 구조 속에 존재하는 여성적 이미지에 개입시킴으로서 여성의 이미지는 ‘기표’(signifier)적인 의미에서의 물리적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Mask_2008_oil on canvas_194x130.3cm

 

 

남대웅의 이번 작품들에서 기표적인 이미지들은 현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으로 다양한 여성성의 의미들을 구축하는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제의 표상(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로 개입한 그의 이미지 언어들은 더 이상 그의 예술적인 자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는 그의 이미지들이 이미 정체성의 차원이나 삶의 본질에 대한 차원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진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의 작품들이 대중문화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체계로 진입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삶의 차원과 예술적인 차원이 관련되는 철학적 문제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가 그린 남성들 이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Jim>,  <애국>,  <Untitled>에서 남성들은 온전한 얼굴로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뒷부분만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유혹하는 존재이거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로 제시된다. 성인 영화에서 채취한 이미지인 <Mask>, <Pink Nose>, <Breezed>, <Big Sleep> 같은 작품은 남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이미지로서의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오히려 대중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라는 본래의 상황에서 본다면 이미지에 의한 역전이 일어난다. 즉 1960년대 이후의 팝아트가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는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의 재현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남성과 여성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역전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들이 관음증(Voyeurism)적인 맹목성을 자극함으로써 대중매체적인 지배를 표현한 <Le Dejeuner>과 <Artist's hand> 같은 작품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리고 작가는 이런 상황들을 현대사회의 아이콘에 대한 문제로 진행시켜 왔다.

 

 

Menthol_2008_oil on canvas_50x50cm

 

 

사실 아이콘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이미지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아이콘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원인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거나 제시되고 있는 시대적 요청의 문제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런 아이콘들의 집합이 하나의 기능적인 시스템의 표상들이 된다는 것과 관련된 문제로 변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표상들의 기능적 효과나 의미론적 상황의 가능성을 <Marilyn 보희>, <Madame 미숙> 이라는 80~90년대 영화와 TV라는 대중매체에서 당시의 인기 여배우들의 이미지를 통해 제시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영화에서 어떤 한 장면의 이미지를 작가가 지독히도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몰입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미지는 그의 존재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미 하나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세계이고 그것은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활동에 의해 완성되는 체계이다. 결국 욕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욕망은 삶의 체계화에 관련된 철학적인 질문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작가적인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ink Nose_2008_oil on canvas_61x45.5cm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인간에게 욕망은 삶의 충동을 자극시키는 중요한 에너지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 혹은 꿈과 관련이 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에 의한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창조성이다. 즉 창조적이지 못한 노력은 인습의 반복이 되고, 상상력이 부재하는 연구는 필연적으로 어떤 결핍상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만을 만들어내게 된다. 남대웅의 이번 전시 작품들은 욕망, 상상력, 창조성과 같은 이런 과정들에 대해 개인적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을 굳이 말로 한다면 “예술이 인간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의미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현상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쾌락과 유희 그리고 이미 드러냈기 때문에 상실된 욕망이라는 병리학적인 차원의 관찰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치유적인 기능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장식적이고 자기충족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면 예술이 인간의 삶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관점에 대한 몬드리안의 기여, 즉 자기 성찰의 내적인 가능성에 대한 시각적 제시 같은 그런 관점들이 불러일으키는 삶에 대한 해석의 차원들은 전혀 고려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남대웅의 이번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 드러남으로서 다시 성찰해보게 되는 욕망의 예술적 차원들에 관해 관객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삶 속에서 기능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상황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남대웅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와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우리가 욕망하게 되는 문제는 철학적인 진리성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Spy_2007_oil on paper_33.5x26cm

 

 

 
 

 

 
 

vol. 20080411-남대웅 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