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카파展

 

- 포토저널리즘의 신화 -

 

노르망디상륙작전, 프랑스 오마하해변, 1944년, 6월6일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2007. 3. 29(목) ▶ 2007. 5. 26(토)

MYART 서울 서초구 잠원동 34-11 텍스랜드빌딩 B1 | 02_514_3983~4  

 

부대행사 : 세미나 및 이벤트 행사

주    최 : 한겨레신문사, 중앙대학교, Magnum Photos, ICP

주    관 : ㈜유로커뮤니케이션/한국매그넘에이젼트, 마이아트  

 

 

미군과 전쟁고아, 영국런던, 1943년

 

 

세계최고의 사진작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을 창립한 실질적인 대표이자, 사실적 증언을 위한 투철한 기자정신을 일컷는 카파이즘(Capaism) 용어의 주인공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작품140여 점으로 2007년 3월 29일 ~ 2007년 5월 26일 (58일간)까지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포토저널리즘의 신화 ‘로버트 카파’”전을 개최합니다.

포토저널리즘의 영웅 로버트 카파는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사라진 그의 짧은 41년의 생 동안 리얼한 렌즈로 20세기의 혁명과 전쟁 속에서 그 문명과 인간에 의한 격동의 순간들을 영원으로 남겼습니다.

스페인 내전 중에 ‘병사의 죽음’을 촬영하여 일약 유명한 존재로 등장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 영국, 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최전선에서 때론 군인보다 적진 깊숙이에서 전쟁의 역사와 상처를 오롯이 담았습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촬영을 하다가 지뢰를 밟아 최후를 마쳤습니다. 전쟁터의 사실적 묘사와 그로 인한 군인과 시민에 미치는 엄청난 충격 모두를 충분히 소화해 낸. 그의 작품을 통해 사진사 속에서의 사실성, 현장성, 직접성이라는 사진미학의 진수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병사의 죽음, 스페인 세로 무리아노의 코르도바 전선,1936년 9월 5일

 

 

매그넘으로 부터 들여오는 이번 전시는 20세기 가장 대표적 전쟁 기록 사진으로 평가되는 “쓰러지는 병사”를 비롯한 세계역사적 상황을 리얼하게 담아낸 작품들을 통해 보도사진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대규모 특별전입니다. 로버트 카파의 방대한 사진 세계에서 엄선된 약 140점이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전시됩니다

사용하기 빠른 소형 카메라를 사용한 로버트 카파는 초소형의 카메라와 인간정신의 결합을 통한 사진가의 정신으로 인간의 미래를 열고자 한 작가로, 관람자는 현대문화의 창작성과 제2의 카파이즘을 발견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하게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다.

- 로버트 카파(Robert Capa)

 

포토저널리즘의 신화의 탄생

 

헝가리 출신 유대인, 로버트 카파(본명은 Andre Friedmann)는 1913년 10월 22일에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제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앙드레가 겨우 17세 되었을 때에 공산당원과 만난 것이 비밀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헝가리를 떠나 정치적인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31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언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 암실 조수 겸 사환으로 데포트 통신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 통신사의 사주인 시몬 굿맨은 앙드레의 심미안을 인정하여 어사인먼트를 수행하도록 파견하기도 했다. 1932년 11월 27일 슈피겔 지를 위해서 카파는 러시아혁명의 역사에 관하여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강연할 예정인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촬영하는 어사인먼트를 맡았다. 트로츠키는 레닌 사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여 추방당하였다. 카파는 연단 가까이로 접근하여 열띤 연설을 하는  레온 트로츠키를 촬영하였다. 슈피겔 지는 앙드레의 사진을 한 페이지 가득 게재했고, ‘Friedmann-Degephot'라고 저작권을 표기했다. 이 사진은 매체에 처음 인쇄된 카파의 사진으로 17세에 정치적인 망명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카파의 노망명가 트로츠키를 향한 존경의 앵글을 읽을 수 있다.

 

 

소년유격대 장례식에서 어머니들의 절규, 이탈리아 나폴리, 1943년 10월2일

 

 

카파가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촬영한 ‘병사의 죽음’ 사진이었다. 스페인내전은 카톨릭 교회와 대지주, 군인들이 기득권을 지켜온 스페인에서 총선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된 공화전선이 승리하자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군부 세력이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쿠테타를 주도하면서 발발하였다. 마드리드로 몰려오는 프랑코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총 6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민병대로 참가 했다.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포토저널리스트, 자유주의자, 반 파시트로서 카파 또한 스페인내전에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카파는 뷰 지로부터 어사인먼트를 받아 잡지사가 전세 낸 비행기로 애인인 여류 사진가 게르다 타로(Gerda Taro)와 함께 전선으로 떠났다.

  그는 참호에서 뛰쳐나와 총을 든 채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공화군의 병사, 페데리코 갈시아의 죽음을 촬영하였다. 젊은 병사가 넓디넓은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 채, 피폐한 대지로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순교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듯 종교적 감화는 스페인 내전이 순교할 가치가 있는 성전으로 인식시킨다. 카파의 ‘병사의 죽음’은 뷰 지에 실렸고 ‘그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여 쓰러지는 순간의 공화군의 한 병사’라는 캡션을 붙여 라이프 지에 의해서 채택되었을 때 카파는 저명인사가 되었다. 공화주의 희생의 강한 상징이 된 비극적인 죽음의 사진은 너무나 생생하여 전쟁사진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격찬을 받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와 함께 스페인내전을 다룬 불후의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승리의 행진, 프란스 샹젤리제 거리 1944년 8월 26일

 

 

전쟁의 실상과 휴머니즘

 

1) 전쟁의 실상과 그 이면의 휴머니즘

카파는 스스로를 리포터라고 생각했다. 포토저널리즘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후 젊은 카파에게 더 이상의 다른 선택은 없었다. 아프리카, 이탈리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해방과 수많은 전쟁사진을 촬영한 카파는 전쟁이 미화되는 것을 공격해 왔지만 정작 자신은 전쟁 없이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1943년. 카파는 독일군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침략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총공격을 취재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갔다. 곧이어 카파는 이탈리아에 상륙을 했고 제82공수단과 영국장갑사단을 따라서 파괴된 나폴리로 들어갔다. 그 곳은 집을 잃은 수천가구들이 폐허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카파가 취재하는 동안 독일군이 설치해 놓은 대인 위장 폭탄이 공공건물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보메로 지역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한 선생님의 지도아래 10대 학생들이 총과 화약을 훔쳐 독일 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학교에 소년 유격대의 시체가 입관된 20개의 관이 있었다. 그 관들은 나이어린 아이들을 위한 관이었기에 관의 끝으로 발이 삐져나왔다. 카파는 그 때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로 가는 길은 학교건물 앞에 말없이 슬픔에 잠긴 행렬로 차단되었다. 학교 안에는 제대로 조화가 덮이지 않았고 너무 길이가 짧아서 발을 다 가리지 못한 유치한 관 20개가 있었다. 나폴리의 소년들은 소총과 실탄을 탈취하여 연합군이 진군할 때까지 4일간 독일 군과 싸우다 죽은 것이다 ” 이 날 카파는 소년들의 장례를 치르며 오열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생생하게 전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에 출현을 맏은 잉그리트 버그만, 미국 할리우드,1946

 

 

2) D-Day 신화의 탄생  

1944년 6월 6일은 "D-Day"란 말이 역사적인 단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동틀녘 오마하 해변의 물은 차가웠다. 카파는 제1파 상륙정을 탔던 군인들 틈에 섞여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상륙정에서 내렸지만 해안까지는 100m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제1파로 상륙정에 승선했던 군인은 해변의 모래밭에 닿기도 전에 거의 모두 죽고 말았다. 그 날 2,000여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상륙 초기의 3주간 연합군의 손해는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만 1796명이고, 독일군 포로는 약 4만 1000명이나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할지도 실패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카파는 빗발치는 폭탄 속에서 떨 수밖에 없는 전율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라이프 지에 이 사진이 실렸을 때, 사람들은 흔들린 초점으로 작전 당시의 긴박함과 전쟁이란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라이프 지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Slightly out of focus)” 라는 캡션을 달았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군인의 사진이 2차 세계대전동안 촬영된 모든 사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전쟁사진이 되었다.   

 

3) 승리/해방

1944년 8월 25일, 카파는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와 함께 파리로 입성했다. 그는 5년 만에 유일하게 고향으로 여기는 도시로 돌아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렸고 환호는 군중들과  포옹을 나누었다. 그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카파 최후의 사진, 인도차이나 전쟁, 1945년 5월25일

 

 

8월 26일, 카파는 개선문에서 노트르담까지 승리의 행진을 촬영했다. 특히 샹젤리제 거리에 모인 군중들은 차위나 탱크 위에 까지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환희에 찬 그날, 그가 찍은 파리의 이미지들은 해방의 기쁨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행렬은 빌레 호텔 앞에서 갑자기 끝나버렸다. 부대에서 이탈한 독일 저격병들이 항복 명령을 듣지 못했는지 군중을 향해 별안간 발포했다. 그는 수천 명의 파리 시민들이 도로 바닥에 순식간에 엎드리는 공포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카파는 이전 전쟁 사진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전쟁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투지역에 가까이 접근하여 촬영한 사진들은 군인들의 눈에 비친 두려움을 보여 주었고 대포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 소총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사진들에는 늘 인간에 대한 특별한 연민이 배여 있었다. 그 인간애를 맑은 고딕으로 전쟁의 공포와 절망과 살벌함 속에서 죽어 가는 군인들과 부상자들, 피난민들, 어린이들을 보여 주었다.

 

자유로운 보헤미안

 

카파는 은막의 여왕 잉그리드 버그먼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당대 최고의 문인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과 호형호제할 정도였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와 게리 쿠퍼와도 친분이 있었다. ‘전쟁 사진의 대부’, ‘종군기자의 전설’ 로 불리는 카파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20세기의 보헤미언이었고 모험가였고 로맨티스트였다.

  1950년대 초에 매그넘의 뉴욕 오피스나 파리 오피스로 매그넘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순전히 활기 넘침에, 젊은 스탭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태도에, 비지니스와 즐거움의 흥분된 혼합에, 세계도처에 색다른 지역에 있는 사진가들로부터 케이블로 이미지를 받고 급히 보내는 분주함에 누구나 감동을 받았다. 두 오피스 중에 어디에서도 카파의 친구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어윈 쇼, 존 휴스턴, 험프리 보가트 등을 마주치기 십상이었다. 그들은 우연히 떠내려 들어오고 나갔다. 당시에 만약 당신이 매그넘 오피스를 방문했다면, 당신은 카파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지루하고 시끄러운 점심식사나, 경마장이나, 파티에 휩쓸려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Robert Capa,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1952 루스올킨 촬영

 

 

전설이 된 사진작가

 

인도차이나전쟁은 카파에게 다섯 번째 전쟁이었고 그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종군사진기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카파는 과감하게 나가서 논에 있는 소대를 촬영했다. 그것이 그가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는 다른 각도에서 군인들을 찍으려고 도랑의 풀이 있는 경사를 기어오르다가 대인 지뢰를 밟았다. 로버트 카파는 한 손에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가 잘려나가고 흉부가 파열된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쟁을 진정으로 증오했던 종군 사진가, 카파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다가 탱크에 치어 죽음을 맞은 애인, 게르타처럼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총각사진가, 카파는 불혹의 나이에 대인지뢰를 밟아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순직한 첫 번째 미국인 포토저널리스트가 되었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 출신 존 스타인벡은 카파의 죽음을 접하고 몇 시간 동안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잃어버린 친구를 위한 감동적인 비문을 지었다. “카파의 위대함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진실 되고 활력이 넘치는 그의 사진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카파는 더욱더 중요한 다른 일을 남겼다. 그는 그의 주변에 젊은이들을 모아서 격려하고, 가르치고, 심지어 먹이고 입히기 조차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젊은이들에게 베푼 최상의 것은 그들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그것의 실행에 있어서 성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번도 그들에게 카파 자신의 사진과 같은 부류의 사진을 찍도록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 생애에 있어서 카파의 작은 부분을 지니게 될 것이고 그들은 카파를 그들의 젊은이들에게 전할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예견대로 매그넘은 오늘날,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최고의 다큐사진 에이전시가 되었다.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미국,  1913∼1954)

1913년 10월 22일 :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본명: 앙드레 프리드만) | 1931년 17세 되던 해에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헝가리를 떠나 독일로 이주 | 1932년 사진통신사 데포트(Dephot)에서 암실조수를 하면서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가 | 레온 트로츠키의 코펜하겐 강연 취재 |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베를린을 떠나 부다페스트를 거쳐 파리로 이주 | 1935년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포토저널리스트로서의 삶 시작 | 1936년  스페인 내전 촬영. ‘병사의 죽음’의 사진이 라이프 지에 소개되면서 카파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짐

1938년  중국에서 중일 전쟁 촬영 | 1941년 ~ 45년  제2차 세계 대전 촬영. 특히 노르망디 상륙 사진이 유명 | 1945년  전쟁 종결 후 미국시민으로 귀화 | 1947년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사진에이전시 '매그넘' 결성 | 1948년  50년 : 중동전쟁 취재 | 1953년  미국 정부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몇 달간 여권 중지 당함 | 1954년 5월 24일 : 라이프 지의 요청으로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아 순직

 

■ 학술세미나

ICP 부 디렉터 Steve Rooney 심포지엄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 국제사진센터) | “21세기에 있어서 카파이즘의 가치와 포토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사진의 전망”| 일시 : 2007년 4월 4일 오후 2시 | 장소 : 중앙대학교 아트센터 대극장

 

성인 10,000 | 8,000단체(20인 이상) | 만 25세 이상

대학생  8,000 | 6,000단체(20인 이상) | 만 24세 이하 및 대학생

중/고생 6,000 | 4,000단체(20인 이상) | 하사 이하 현역군인

초등 유치원생 | 5,000 | 4,000단체(20인 이상) | 유치원생 이하 보호자 동반 의무

특별관람요금  - 만65세 이상, 지체장애인 무료

생활보호대상자, 국가유공자, 만 5세 미만 무료

 
 

 

 
 

vol.20070329-로버트 카파 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