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메일 - 홍순환 개인展 - 20070301
 

 
 

 

 

홍순환 개인展

 

- 중력의 구조 -

 

 

 

관훈갤러리

 

2007. 3. 1(목) ▶ 2007. 3.10(토)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 02-733-6469

 

 

 

 

비진리의 바다에서 항해하기

 

-홍순환, ‘중력의 구조’전에 부쳐-

 

 박응주 | 미술평론가

"전체는 비진리다"고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단언했다. 따라서 우린 예컨대 풍성히 과실이 열려있는 한 그루 나무의 만개(滿開)를 칭찬할 수도, 그렇다고 그 만개 밑에 드리워진 공포의 그늘로 인해 죽어가는 음지의 식물을 위로 할 수만도 없다고 말한다. 과실의 만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고 ‘칭찬’하는 경우란 즉시 아름답지 못한 음지식물이라는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 될 것이요, 음지의 식물을‘위로’하는 경우란 그 허약함을 긍휼히 여기는 순간 곧 ‘그가 허약하다’는 것, 그걸 ‘나는 안다’는 것, 즉 지배의 전제조건을 확인할 뿐이라는 점에서, 역시 권력이 행사되는 것에 다름 아니기에...., 진정한 예술 작품은 현실로부터 완전히 지양된 무엇, 즉 타자이며 비존재자로서, 억지 종합이나 화해를 부정하는 ‘매개(媒介)’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예술론이 피력되는 곳이 이곳이다.

...(중략)...

 

 

 

 

예컨대 홍순환의 개념 미술을 이해할 밑돌로 삼아 볼 것을 요약해 본다면, 그의‘중력’이란, 중력 밑에 눌린 실체(그림이라면 그림의 배후인), 인간을 포함함 사물들의 이미지로부터의 사라짐, 즉 왜곡되기 이전의 즉자적인 사물의 상태에서 발하는 은은한 태고의 향기의 사라짐을 애석해하는 그리움 혹은 사랑의 연정을 깔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러나 이를 “악을 이야기하면서 선을 환기하는 어법”으로 치부하면서 그 어법은 너무 겸손했거나 혹은 너무 순진했거나 일 수 있으리라고 기술한 바 있다. (<2006 젊은 예술활동 비평 모음집>, 경기문화재단 出刊)잘못 보았다! 순진한 건 내 쪽이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건 물론 이번 전시이다. 즉 그도 잘못 본 것이라 얘기하려는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내가 잘못 본 건지 그가 잘못 본 건지 잘 모르겠다...

육중한 열주들이 늘어선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 본다. 고대 유럽의 신전을 떠받쳤던 대리석 기둥을 환기하는 열주들이 전시장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초(定礎)는 어이없게도 낚시나 산(山) 패션, 전자제품, 컴퓨터, 대중음악, 장식용품 등속을 소개하는 대중문화의 잡지들로 초석을 삼고 있다. 한편 열주들이 세로로 두 줄 나란한 회랑의 정면으로는 영상이, 실제의 콘크리트 기둥들이 도열한 건물 내부의 공간, 그 소실점의 지점에는 한 개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영상작품이 있으며, 좌우 측면벽에도 초원이나 개간 예정지임이 분명해 보이는 벌판에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영상 작품이 배치되었다.

 

 

 

 

 

그에게 대리석 기둥의 알레고리는 이번 전시에서만 처음 보이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06년의 전시에서 그는 기둥 중간에 연약하디 연약한 화초가 심어진 화분이 매달려 있고 기둥의 주두와 천장 사이로는 자신의 작업 신발, 헌옷가지 등을 채워 넣은 이번 보다는 원주가 보다 작은 기둥을 내 놓은 있다.

이른바, 대지에 뿌리 박은 기둥(실제로는 전시장 바닥에 그냥 놓여져 있는)의 육중한 중력과 섬약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연의 가벼운 중력을 대비시키며 자신의 작업(예술가의 일)이 두 가지의 중력을 드러내는 일일 것임을 기둥의 저 높은 곳에서 이윽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분신, 자소상인 것이다.

그에 견준다면 이번의 매재들은 보다 사회적이고 이념지향적이다. 그것은 매개(媒介)의 역할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한 장치들이 대중문화의 잡지들 (취미 수집이라는 모종의 성욕과도 유사한,‘수집가-현대인’의 전이된 성적 욕구)과 연한 보라색 파스텔톤의 펄이 칠해진 기둥 (전통적 색이 표현적이라면 자연으로부터 분리돼 보다 인위적인 것이 되어 전통적인 의미체계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 그리하여 보다 기능적인 것으로 보강되는), 그리고 자연(自然)과 인공 혹은 문화(文化)를 대비하려는‘초원의 빛-불’ 영상이다.

그의 매개란 이들, 보다 사회적이 된 술어적 상황들 (영상에 비친 폐허 혹은     황량한 건물 내부들은 임박해 있는 계발 예정지, 파헤쳐질 운명의 자연 상태     에 대한 문명비판적 연민을 처연히 깔고 있다는 것, 결국 이 연민으로 문화의 자연 파괴적 드라이브를 ‘고발’하겠다는 사회적 술어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을 통해 보다 명시적인 기호학적 배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대지의 푸르름-불, 생육-죽음, 자연-인공, 삶-죽음의 기호쌍이다. 그는 이제 생명의 사라짐에 대한 제의, 대속(代贖)의 집전자로서의 예술가의 상이라는 요셉 보이스의 어느 지점쯤을 상기하게 한다.

 

 

 

 

그러나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밝히고 있는 바처럼, 모든 운동 전체는 사회적인 과정으로서 나타난다는 점, 즉 모든 사회적인 현상의 진정한 배후에는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그 출발점으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사유의 단초를 우리의 삶에 위협적으로 접근해 오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소위 자연 속으로, 싱겁기 짝이 없는 농촌의 목가 상태 속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것은 ‘여성적인 체념’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인간 때문에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자연에다, 혹은 자연을 모델로 자연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퇴화상태같은 것에다 전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나 반동의 차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일테다.

 

 

 

 

 

따라서 나의 지난번의 그의‘잉여없는 표현’에 대한 유보적 가치평가의 말과 함께‘겸손과 순진’운운의 말이 결국 그에게 진보에 대한 주문이 되고야 말았다면 이는 거둬들여져야한다.

형식적 변증법에 휘둘리는 선동적 소환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되기 위한 퇴폐적이고 극단적이며 래디칼한 자기 성찰의 몸부림을 훨씬 더 절박한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예술가의 몫에 훨씬 더 가까울 수 있을 것이라는 ‘주문’일 터. 그의 이번 작품이 ‘진보’에 대한 어떤 강박으로 인해‘홀로 선 자’의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싹을 슬며시 내미는 지점이 있다면, 이 또한‘순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곧장 그것이 등장하자마자 생태학적 연민을 자아내는 초원의 울음(영상)이 문제인가? (‘초원’이 제거된 화면 가득히 불타오르는‘그냥 불’의 무국적적 영상이었으면 어땠을까...?),

열주와 그 초석으로 받쳐진 대중문화 코드들의 환유가 문제였을까?

그가 외로움을 버티어낼 여력이 소진되어 가는 것인가?

그러나 이 모든 세부의 술어적 판단의 정밀성을 따지는 나의 팍팍한 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내재적인 정합성은 미덕이다. 그는 여전히‘겸손’하고‘순진’하다는 것. 최소한 예술을 비진리의 바다에서 무동력선에 실어 항해할 것을 결심한다는 것.  

 

 

 

 

 

 
 

 

 
 

vol.20070301-홍순환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