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메일 - 이일우 사진展 - 20070228
 

 
 

 

 

이일우 사진展

 

 

 

 

문신미술관 빛갤러리

 

2007. 2. 28(수) ▶ 2007. 3. 16(금)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 르네상스 플라자 B1 | 02_710_9280

 

www.moonshin.or.kr

 

 

 

 

이일우의 작업노트 중에서

 

무엇이 그녀의 시선을 바다로 향하게 하는 걸까? 이스탄불의 바다에서 만난 사람들은 인도의 칸야쿠마리에서 본 사람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어쩌면 환경과 사람이 다르니 거기에서 느껴지는 내 감정에도 차이가 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도에서는 작업이 감정적인 접근이 강했다면 이스탄불에서 나는 언타이틀 투 초상 작업의 시각적인 즐거움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이 즐겁다. 문득 내가 작업한 사진 속 초상을 보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진다. 초상의 시선, 사진 속 초상을 보는 사진 밖 사람의 시선이 사진이라는 세계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성급한 생각일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시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기 보다는 초상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 것 같다. 어쩌면 ‘시선’을 ‘초상’과 연결시키기에는 내가 접근하는 ‘초상’이라는 대상이 처음부터 너무 벅찬 대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이일우-작품에서 읽는 소통의 메커니즘

그의 작품엔 정답이 없다. 답은 관자들 개인의 문제일 뿐

 

소통은 반드시 주고받을 상대가 전제된다. 즉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고 또 이 둘 사이에 정보를 전달해줄 매체가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미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정보를 보는 자들에게 전해 준다는 점에서 분명 소통의 매체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결국 작가는 창작이라는 ‘약호화’ 과정을 거처 작품을 완성하고 이 작품을 ‘해독’하는 과정을 통해 관자(觀者)는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소통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다.

이일우의 작품은 이러한 메커니즘의 양방향 소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담을 미적, 의미적 정보를 최소화함으로 ‘약호화’ 과정을 간단히 하고 오히려 관자의 입장에서 소통을 시도할 것을 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초상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작가와 대상간의 긴장감은 오히려 약화되고 관자와 초상의 대상간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려 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인물도 하나의 초상이지만, 나는 내 작업을 보는 관객들도 각각의 초상이라고 생각한다. 즉 작업을 보는 것 자체가 초상과 초상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 작품의 대상, 그리고 관자의 삼위일체가 그의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삼자의 묘한 만남의 긴장이 그의 작품에서 일어난다. 작가는 양방향 소통을 위해 사진의 테크닉은 물론, 작품의 대상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이나 의미의 부여도 최소화한다. 이런 단순화를 통해 작가는 관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작품 속의 대상과 소통하길 원한다. 어떤 면에서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단순함이 오히려 뭔가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가지게도 한다. 그리하여 ‘해독(解讀)’의 과정을 복잡하게 전개할 위험도 있고, 반면 너무 가볍게 그냥 지나쳐버릴 위험도 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은 작품 속 대상들의 손짓에서 해소된다. 그의 작품 속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사진 속 또는 사진 밖의 어디를 늘 가리키고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작가도 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작가가 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한 유일한 사진적 기술이다. 작가는 작품 속 대상과 소통하고 또 그 대상은 관자들과 소통한다. 이것이 작가가 이번 작품들을 통해 시도하는 소통의 메커니즘이다.

 

 

 

 

 

그의 작품에는 결국 정답이 없다. 발신자가 전해줄 정보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기에 수신자는 자기 관점에서 이를 해석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답은 관자들 개인의 문제로 남는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해석’에 얽매일 필요 없이 다양한 상상을 통해 감상이 가능하다. 관자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어떤 해석을 하던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수신자인 관자가 동시에 발신자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마치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양방향 소통과 정보의 교환이 가능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관자는 그의 작품 앞에서 정보의 수신자의 위치에서 발신자의 위치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글 | 채창완

 
 

 

 
 

vol.2007-228-이일우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