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메일 - 모란 이후의 모란展 - 20070214
 

 
 

 

 

모란 이후의 모란展

 

김근중_Natural Being6-19_150x200cm_캔버스에 아크릴_2006

 

 

대전시립미술관

 

2007. 2. 14(수) ▶ 2007. 3. 29(목)

대전시 서구 만년동 396번지 | 042_602_3200

 

 

김용철_화조도-모란과 매화_116.8x60.4cm_캔버스에 아크릴, 메탈릭피그먼트 꼴라주_2001

 

 

친근하고, 낯설고, 눈물을 닦아주는 모란들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와 당연한 결합을 이루는 경우는 없다. 사물들은 그저 각각의 존재 방식과 생명을 가지고 인간의 근처에서 존재할 따름이며, 그 자신이 길함 또는 불길함, 고고함, 청빈함 등의 가치를 의식하거나 그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이 표상하는 모든 의미와 가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세상을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번안하기 위해 특정 사물이 가지는 특성들을 인간화하여 이해해 왔다. 체험의 구체성에 기반하여 사물의 특성을 관찰한 결과를 통해, 세상을 낯설고 무의미한 상태에서 의미 표상의 조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은 사물에 인간적 의미와 가치를 덧씌우는 방법을 통해 사회와 문화의 규범을 전하기도 하고 소망을 기원(祈願)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적 의미를 담은 많은 사물들 가운데 꽃은 그 다양하고 풍부한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동양권에서 가장 익숙하게 등장하는 꽃이 연꽃과 매화이다. 진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가장 고결한 꽃을 피워내는 연꽃은 사바세계에서 열반을 구하는 불교정신의 대표적인 상징물이고, 매화는 봄이 오기 전 눈 속에서 피어난다 하여 유교적 선비의 고매한 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유래로 모든 불상들은 연꽃 좌대 위에 앉아 있고, 눈 내린 한겨울에 매화를 찾아나서는 선비가 등장하는 탐매도(探梅圖)가 그려졌다.

 

 

 

김은진_특별미인도2_한지에 채색_80×175cm_2005

 

 

의미의 방향으로 보자면 연꽃과 매화 등의 꽃과 정반대의 가치를 바라보고 있는 꽃이 바로 ‘모란’이다. 모란은 동양권의 역사 속에서 부귀공명과 영화, 길함과 복됨을 상징해왔다. 부귀공명과 행복은 유가적 군자의 즐거움도 불교적 해탈의 기쁨도 아니고 소인, 범인의 것에 해당된다. 연꽃이나 매화는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초탈하는 듯한 생태의 습성 때문에 그 면면을 닮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 칭송되고 재현되었지만, 모란은 그 거나하고 풍만한 외적 아름다움이 일차적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그 아름다움은, 탐스러운 무희와 같은 장미의 유혹을 받아들일 것이냐 흰 백발의 할미꽃의 충언을 받아들일 것이냐를 갈등하는 “화왕(花王)”으로 모란을 비유한 신라시대 설총(薛聰)의 설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권력을 가진 현세적인 아름다움이다. 모란의 흐벅진 아름다움을 현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의미화 때문에, 조선시대 강희안(姜希顔)은 고결한 연꽃과 매화의 아름다움과 비교해볼 때 모란을 한 단계 낮은 것으로 평가했고, 송나라 주돈이(周敦?)는 모란이 꽃 중에서 부귀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이들이 모란을 사랑하지만 자신은 연꽃을 사랑하겠노라 선언했던 것이다.

 

 

김지혜_여인평생도_처, 모_각 76x100cm_피그먼트 라이너, 캔버스에 아크릴_2006

 

 

그러나 모란의 이러한 현세적인 속성은 오히려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왕실로부터 백성까지 널리 애호되어 생활 속에 자리잡는 조건이 되었다. 결혼하는 신부의 활옷이나 배게, 이불 등의 자수품, 도자기나 목칠기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조선 말기의 민화 속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방식으로 여러 전형을 구축하며 형상화 되었다. 생활 속에서 친숙했던 모란 이미지는 서구적인 생활방식의 수용과 전통의 단절로 이전처럼 활발하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의로 많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모란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의미의 폭을 넓혀 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될 만하다. 더욱이 모란은 여타 다른 도상들에 비해 더욱 두드러지게 현대 화가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절된 듯 보였던 과거 전통을 자유로이 참조하고 변형하는 현재 우리 미술의 독특한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최근 우리 미술계에는 전통 미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낯설어하는 단절감이나 보존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대담하게 차용하고 변형하고 패러디하는 양상이 활발하게 보여지고 있다. 어떤 상위 가치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가볍고 즐겁게 아이쇼핑을 하는 것 같은 태도로 대상을 취하는 가운데, 특히 민화는 현세대에게 있어 유전자에 새겨진 공동체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 기억에 기대어 소통의 채널을 찾는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대체로 과거의 도상을 수용하고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또는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옛 것을 반복하는 방식과, 새로운 것들을 빠른 속도로 학습하고 수용하는 방식의 사이에 위치한다.

 

 

박완용_生06-22_35x47.2cm_비단,금박,채색_2006

 

 

예컨대 홍지연의 경우, 첫눈에는 민화의 모란도를 아크릴 채색의 방식으로 번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 아니라, 역시 모란 그림은 참으로 화사하고 예쁘다, 라는 명쾌하고 흐뭇한 감상을 안고 돌아서게 되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모란은 과거에 그것이 안고 있었던 가치들을 불길하게 뒤집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화병에 얌전히 꽂혀 있는 모란들은 서서히 불길에 휩싸이고 있고, 일월이 그려진 모란도에서 한가로이 노닐어야 할 새들은 당황스런 날개짓으로 어디론가 피난 중이다. 의미 전복의 정점이 이르고 있는 작품은, 검은 배경에 모란을 음표삼아 진혼곡의 악보를 형상화하고 있는 <레퀴엠>이다. 부귀로운 삶의 상징물을 통해 죽음의 애가를 그려내는 아이러니는, 삶의 한가운데서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라’는 서양 바니타스(vanitas)의 메시지를 연상시키기도 하다.

 

 

서희화_문자도-제_21x115x195cm_플라스틱에 아크릴_2006

 

 

화사한 민화의 모란도를 연상케 하면서도 언제나 석연치 않은 물음표를 남기는 김근중의 모란도에는, 여러 의도적인 장치들이 존재한다. 빼곡이 들어찬 모란꽃들 가운데 만화의 언어 전달 수단인 말풍선이 그려져 있거나, 말풍선의 다른 형태로 보이는 구체성을 박탈시킨 새들이 보이거나, ‘A flower is not a flower(꽃은 꽃이 아니다)’라는 식의 영어 메시지가 삽입되거나, 알 수 없는 숫자 기호들,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모든 장치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름답게 그려진 꽃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아있는 말풍선에 습관적으로 관객은 이런 저런 말들을 넣어보게 된다. 그 말들은 그림 속의 모란꽃이 하는 말이자 관객의 말이며, 그림을 감상하는 주체와 그려진 객체가 바로 그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원천적인 방식, 즉 말없는 그림에 말을 걸어 그의 말을 듣고 내 말을 그림에 전하는 감상의 방식을 확인시키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뒤돌아선 전통 의상의 여성들을 그려내는 정명조의 그림에는 배경의 문양으로, 그리고 여성들이 입고 있는 의상의 문양으로 모란이 등장한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철저히 뒷모습이기 때문에 슬프고 처연해 보인다. 매우 정적인 그 인물들은 관객을 향해 표정으로든 몸짓으로든 발언과 표현을 하는 인물들이 아니고, 지나친 성장(盛裝)에 갇혀 문화적으로 학습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전형적인 여인들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벽면에는 모란의 문양이 검거나 붉은 배경에, 혹은 금빛의 배경 위에 올려져 있는데, 이는 뒤돌아선 인물의 내면을 대신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에서 모란은, 의상에 갇힌 뒷모습 여인들의 좌절된 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배경의 색에 따라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암울하게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억눌린 존재들이다. 따라서 오래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 그들이 뒤돌아설까 두렵다.  

 

 

임윤수_따뜻한 식물_90x135cm_사진에 자수_2005

 

 

홍지연, 김근중, 정명조의 작품들에서 모란은 관객을 그림 속으로 흡입하고 몰입케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낯설게 하고 의심케 하고 두려워지게 만드는 수단이다. 친숙하게 눈에 익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 이들의 방법이다. 그래서 이들이 그려내는 모란도는 밝고 따스하기보다 차고 냉정하다.

 

반면 모란이 가진 기복적 상징성을 따스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들이 존재하다. 홍인숙의 그림에서 모란은, 지친 몸을 끌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의 상징물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란이 양식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화의 모란과는 어딘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이 개인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장했던 집에서 모란 나무들을 키웠던 작가의 경험을 통해, 공동체의 기억을 자극하기보다는 지극히 내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로 모란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치 인형놀이를 하는 것처럼 이런 저런 상황 속에 인물들과 모란 나무를 배치한다. 인물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 속 인물들이기도 한데, 부러 서툴게 그린 인물들이 자극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시절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으로 인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모란 나무쪽으로 걸어가며 ‘집에는 아무도 없을거야’라고 말하는 아이들, ‘무지개동산’의 노래 가사가 가차로 쓰여진 그림 속에서 무지개가 걸린 모란 나무 아래 즐거이 길을 가는 아이들은, 이미 성인이 된 작가가 지난 시절의 자신을 뒤돌아보며 스스로 위로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정명조_아름다움에 대한 역설_91×60.6cm_캔버스에 유채_2007

 

 

김은진의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가 작품 전반에 배어 있다. 그의 그림에서 모란은 사람을 닮은 형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세포가 이상 증식한 기형의 사람처럼 비틀어져 있는 인삼(人蔘)의 몸에 문신을 하듯이 그려 넣은 모란들, 그리고 가슴과 손에 칼집이 잡혀 있는, 피 흘리는 인형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모란들은, 세상의 모든 불쌍한 것들, 생명이 있어 불쌍하고 생명을 잃어 불쌍한 모든 것들에게 선사하는 작가의 선물이다. 현세에서 아프고 피 흘리더라도 내세에서는 이 모란을 잃지 말고 있다가 반드시 영화로운 삶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작가의 전언은, 관객에게 잠시 삶의 노고를 내려놓고 위로받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조금 더 서늘한 위로의 방식을 보이는 엄정순의 모란은, 제사상에 놓인 꽃이다. 그것은 민화의 사당도(祠堂圖), 즉 이동식 제사상 그림에 등장하는 모란 이미지들을 공간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방식은 엄정순의 이전작들과 판이한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그는 오랜 동안 대상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대상을 눈으로 더듬어 그것을 선으로 개념화시켜 그려 나가는 태도를 고수해왔고, 그것은 대상을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를 이루었다. 그가 그려냈던 선이 집적되어 이루어낸 이미지들은 대체로 식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려진 대상이 식물이든 풍경이든 그것은 엄정순의 눈으로 바라본, 따라서 보는 이들은 그의 시각의 결을 그대로 따라 읽을 수밖에 없는, 혹은 읽혀지지 않는 이미지였다. 엄정순은 올곧게 이어오던 이러한 작품 제작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는 바라보는 대상을 의심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고독한 내면의 세계로부터 일어나, 과거의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며 공동체의 기억과 소통하고자 하며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말수가 적던 내성적인 아이가 처음 웃으며 말문을 트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긴장되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를 기울여 그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지병으로 황폐해진 어머니의 몸에 모란꽃을 얹어주는 임윤수의 작품은, 사진에 자수를 놓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인간에게 지난 세월은 고스란히 몸에 새겨지는 법, 주름이나 늘어진 가슴, 버석거리는 듯 보이는 피부는 몸을 이끌고 세상을 관통한 흔적들이다. 아이는 자라고 어머니는 늙어, 그 아이는 어머니의 젊던 시절을 기억하며 시들어가는 몸을, 그 몸이 말하고 있는 지난 세월을 위로하고자 한다. 위로의 방식으로 임윤수는 축복의 도상 모란을 어머니의 몸에 수 놓는다. 사진 인화지에 직접 자수를 놓는 방식으로 그는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어머니를 바라보는 스스로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조은영_궁중한류모란도 시리즈(김희선)_141x43cm_한지에 먹, 수간분채, 사진_2005

 

 

플라스틱 폐자재를 모아 절단하고 용접하고 색을 칠해 민화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서희화의 작품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지점과 더불어 그것을 유머와 재치로 승화시키는 지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량으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제품들은 썩지 않으며,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류의 단견(短見)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태이다. 플라스틱 제품들은 현대인의 단기적인 욕망에 봉사하고 역시 단기간 내에 버려진다. 그렇게 버려진 플라스틱 장난감들, 일회용 숟가락, 옷걸이 등을 이용해 그는 민화 속에 등장하는 모란꽃을 만들어내고 글씨도 쓰고 사람도 만든다. 민화가 지난 시대 인간들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지녔기에, 현대인의 욕망의 부산물인 플라스틱폐자재로 다시 재현하는 민화 이미지는 다소간의 아이러니적인 메시지를 낳는다. 이 메시지는 현대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메시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플라스틱 폐자재는 버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으로 재탄생하였고, 그것들은 낡고 고장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맥락 속에서 새로운 기능을 가졌으며, 인류의 욕망은 단기적 욕망에 눈멀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 이미지가 전하는 소망이 인류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을 돌이켜 낯설게 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수단으로 모란을 선택했던 이들이 있고,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위로하고, 세상의 버려지고 불쌍한 것들을 쓰다듬으며, 고독한 자아로부터 소통의 세계로 나가려는 수단으로 모란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면, 모란이 가진 축복의 메시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도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홍지연_symptom_193x130cm_캔버스에 아크릴_2006

 

 

조은영의 <궁중한류모란도> 시리즈는 제목에서 작품의 소재가 한류스타와 궁중모란도라는 것을 지시한다. 모란꽃은 미디어에서 자태를 뽐내는 화려한 스타들의 얼굴로 일대일 치환되어 있다. 궁중모란도는 궁중의 경축 행사에서 배경으로 사용되어 즐거운 흥취를 더하는 역할을 했던 병풍 그림으로, 조선시대 모란도 중 가장 화려한 기품을 자랑하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조은영은 궁중모란도의 화려한 모란처럼 한류스타들이 더욱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작가의 의도대로 한껏 피어있는 꽃과 인생의 절정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를 스타들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풍성하게 피어있는 꽃이 영원할 수는 없듯이 대중스타들의 반짝임이 내포할 수밖에 없는 허무성을 모란과 대중스타를 직접 만나게 한 그의 작품에서 보게 된다.

 

산다는 것(生)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작업테마인 박완용은, 그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모란을 선택했다. 민화의 모란도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초현실적이다. 민화의 모란이 단단한 실체감과 중후함을 가진 반면, 박완용의 모란은 눈을 뜨면 사라질 것 같은 꿈의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은 모란의 더미들 속을  춤을 추듯 유영하는 나비들이 이루어내는 화면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금은박의 반짝임과 더불어 그의 모란들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에 서서, 그 아름다움이 내포한 죽음까지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한복희_원피스,스카프_광목에 안료, 염색_2006

 

 

김지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란은, 자유분방하게 전통을 차용하는 그의 젊은 낙천성과 대담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재이다. 그는 민화의 책가도 이미지를 이용하는데, 공부가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던 특권이자 의무였던 만큼 선비들이나 공부하는 자제들의 방을 장식하는 용도를 가졌던 책가도가, 김지혜의 손을 거치면 발랄한 현대 여성의 개인적 공간으로 변화된다. 분첩이나 휴대전화, 가방, 콜라, 담배와 같은 물건들이 자유로이 삽입되어 있는 그의 화려한 책가도에는 모란 또한 유쾌한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다.

 

김용철의 모란은 민화의 모란도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의 기조는 보는 이에게 밝은 희망을 주는 것이었고, 처음에는 그것을 위해 하트 형태를 사용해 왔으나 하트가 전하는 메시지를 우리의 전통적인 도상인 모란으로 대체했다. 서양화 매체를 이용하고 서양 종교화의 형식인 삼면화(Triptych)와 이면화(Diptych) 등의 명칭을 제목에 부여하면서도, 그는 온전히 민화의 정서를 받아들여 선량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제작했다. ‘입춘대길’, ‘늘 다복(多福)’ 등의 글귀가 삽입되어 있는 그의 모란 앞에서는 누구나 모란과 같은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은 비틀리고 뒤로 물러서게 하고 당혹케 하는 현대 미술의 실험에 지친 관객에게 마음과 눈이 편안해지는 것도 좋은 감상의 방법이라 말하는 듯하다.

 

자신의 작품을 줄곧 ‘물건’이라 부르는 한복희의 작품들은 모란이 그려진 섬유 공예품들이다. 그는 일찍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섬유에 염료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다가, 파란만장한 인생의 우여곡절 끝에 이름을 얻는다. 옷과 가방, 쿠션과 테이블 러너, 등갓 등 그가 만들어내는 거의 모든 섬유작품들에는 꽃 그림이 올라가 있는데, 그들 중 모란이 가장 아름답다. 실용 기물들에 그가 그려넣는 모란은 그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하여 때로는 슬퍼 쓰러질 것처럼, 때로는 깔깔 웃는 것처럼 각종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의 모란은 민화를 참조한 것도  어떤 동양화풍의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현대 미술의 혹은 현대 공예의 어떤 흐름과 상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모란의 형태와 생태에서 자신의 성정과의 유사성과 더불어 존귀한 아름다움을 본 것이고 그에 매혹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자신이 제작한 모란이 그려진 실용 기물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잠시 내려놓고 귀한 사람이 되어 모란의 축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가 만든 모란 옷을 입고 포근한 모란 쿠션을 궤고 앉아 모란 등불 아래 차를 한 잔 마시는 것, 그것이 그가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과 관계맺기 바라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그의 작품의 제목은 <모란카페>이다.

 

반복하건대, 어떤 사물이 그 자체로 특정한 의미와 당연한 결합을 이루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로부터 흘러왔고, 과거에 사용하던 말과 언어를 사용하는 한 과거의 의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모란의 경우 각종 설화들과 고사들, 전통 민화에서 가졌던 특정한 의미가 우리의 의식에 확연한 인상을 남겼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 지점이 오늘 우리가 모란을 해석하는 생각의 출발점이다.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 각자 개별적인 모란의 도상학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작품들이 개척하고 있는 의미의 세계를 한 자리에 펼쳐, 역사적으로 의미를 담은 도상으로서의 모란의 종과 횡 좌표를 그려 보고자 한다.

 

이윤희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원

 
 

 

 
 

vol.20070214-모란 이후의 모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