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 개인展

 

- Syntagmbrid -

 

 

 

북촌미술관

 

2006. 5. 10(수) ▶ 2006. 6. 4(일)

작가와의 대화 : 2006. 5. 13(토) 오후 2:00, 북촌미술관

110-260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70-4 청남문화원 1F | 02-741-2296

어린이 프로그램 : "행복한 유희" -권여현 선생님 작품 속 이야기

 

www.bukchonartmuseum.com

 

 

 

 

■ 혼성의 공화국, 너무 신나고 너무 가벼운, 그러나 심각한…

 

최 태 만 | 미술평론가, 국민대 교수

그리스신화에서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태양의 신 아폴로의 누이이며 영원한 젊음의 처녀로서 항상 야생적인 모습을 하고 사냥을 즐기는 것으로 표현된다. 퐁텐블르파의 한 화가가 그린 <사냥하는 아르테미스>는 그녀의 이런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머리띠는 달의 여신을 상징하는 초승달로 장식돼 있다. 아르테미스 옆에는 충직한 개가 그녀의 사냥을 돕기 위해 동행한다. 퐁텐블르 숲을 배경으로 한 이 그림 속의 아름다운 여신은 권여현의 작품에서 기이하고 초현실적이며 마구잡이의 혼성된 이미지로 차용되고 있다. 초승달로 장식된 그녀의 머리띠 대신 산발한 머리카락은 뱀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으며, 또 한 마리의 뱀이 건장한 그녀의 팔뚝을 칭칭 감고 있다. 잎이 무성한 나무숲은 소나무로 대체되며 지극히 평면적인 화면 속에 자전거가 느닷없이 등장하는가 하면 올빼미와 부엉이가 자전거 위에 앉아있다. 이 밤새들의 하체는 사람의 다리이며, 화면의 공간으로 보아 무대와도 같은 실내를 카멜레온이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데 그 머리가 작가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혼성의 공화국이자 ‘차용의 차용’임을 드러내는 증거는 여러 군데에서 포착된다. 먼저 반은 올빼미고 반은 사람인 기이한 형상은 에른스트(M. Ernst)의 초현실주의 회화  속에서 익숙하게 봐온 이미지이다. 에른스트의 이 이중이미지는 그러나 신화적, 문학적 주제와는 상관없는 말 그대로 이미지로서의 이미지이며 이미지를 통한 내용과 의미(애초에 없  던 것이긴 하지만)의 교란을 위해 채택된 것이다. 올빼미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와 학문의 여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의 상징물이다. 모두 잠든 밤에도 눈을 반짝이는 올빼미는 어둠 속에서도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새는 지혜로운 동물이다. 그러므로 아르테미스 옆에 느닷없이 출현한 올빼미는 카멜레온으로 변신한 작가 자신의 모습만큼이나 낯설다. 더욱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머리에서 치렁대는 뱀들은 이 난폭한 분노와 복수의 여신(그녀는 니오베의 자식들, 그라티온, 티티오스, 오리온, 악타이온 등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이자 에페수스에서는 아시아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과 동일시된 여신이 실제로는 고르고네스의 막내 메두사임을 암시한다.

 

 

 

 

 

 

밤의 숲을 어슬렁거리는 달의 신이며 난폭한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가 막강한 힘을 지닌 아마조네스와 연관되듯 아름다운 육신에 덧붙여진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이 여신이 곧 메두사이자 아마조네스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퐁텐블르파의 그림에서 개의 이미지는 뒤러(A. Durer)의 판화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전진하는 기사(騎士)를 따르는 충견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듯이 권여현은 그리스 신화(아르테미스, 올빼미), 우리나라의 전통회화(소나무), 뒤샹의 기성품(자전거는 뒤샹의 자전거바퀴를 연상시킨다) 등을 차용하여 작품을 혼성의 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다. 모든 차용된 이미지들이 평등을 보장받는 이 한가롭지만 뒤죽박죽인 공화국의 영토를 카멜레온이 유유히 배회한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르테미스-메두사’가 아니라 작가자신이다. 그는 환경에 따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든지 몸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이미지의 공화국의 진정한 통치자이자 심술꾸러기 요정이다. 전유(appropriation), 전치(displacement), 데페이즈망(depaysement), 병치 등 그가 구사하는 수사(修辭)는 그가 만들어가는 이미지의 공화국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제도이자 법률이며 관습이다. 미술사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자 탕진이란 있을 수 없는 보물창고이다. 미술사란 고갈되지 않는 우물로부터 길어 올린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방법은 패러디이자 패스티시(pastiche)라고 할 수 있다. 제미슨(F. Jameson)은 패스티시에 대해 ‘죽은 언어로 말하는 것이며 또한 풍자정신이 죽어버린 모방’이라고 정의했지만, 권여현의 작품에서 혼성모방은 패러디만큼이나 중요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혼성모방은 아무렇게나 긁어모았지만 중성적 흉내내기가 아니라 분열된 자아란 특이성(idiosyncrecy)에 근거를 둔 일종의 백일몽, 환영, 환상, 악몽, 가위눌림이다.

 

 

 

 

 

 

언제나 주인공이지만 언제든지 추방당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 방치된 자아란 강박은 그로 하여금 나르시시즘을 더욱 강화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아르테미스가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카멜레온이 중심을 차지하듯 그는 이미지의 독재자이지만 생명 또는 사랑을 구걸하는 가련한 반인반수의 괴물이기도 하다. 모로(G. Moreau)가 그린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를 차용한 작품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핑크스는 아마조네스, 유디트, 살로메 등과 함께 남성이 만들어놓은 유형으로서의 여성, 즉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운명적인 여성(femme fatale)’이며, 따라서 모로의 작품은 여성에 대한 강박적 공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권여현의 작품에서 남녀의 위치는 뒤바뀐다. 오이디푸스의 자리를 차지한 여성은 당당하며, 남성(작가자신)은 괴물의 위력을 상실한 채 애처롭게 그녀에게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치이동을 ‘여성에의 복종’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켄타우로스>에서 그는 여성을 납치하는 탐욕적인 괴수로 등장한다. 그러나 켄타우로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죽거나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이 라피타이 족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술을 마시고 취기를 못 이겨 신부를 납치하려다 결국 테세우스가 이끄는 라피타이 족  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가련한 인간이자 동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승리는 곧 그의 패배와 직결된다. 이처럼 자신의 그림 속에서 그는 사이코드라마의 역할교환처럼 성실한 순례자(고갱의 <천사와의 싸움)에서 경건한 예배자), 피그말리온(예술가), 침탈자(루소의 <잠자는 집시여인>에서 사자), 방관자이거나 증인(에른스트의 <식육여인>에서 희생당한 동족을 외면하는 새), 황제(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 유유자적인 선비(안중식의 <탁족도>에서 선사), 쫓기는 호랑이(수렵도) 등 언제나 자신의 위치, 입장, 지위를 바꿀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이자 안타고니스트(주인공에 적대적인 존재)인 그는 적어도 그림 속에서 해방을 누리는 존재이다. 마치 한 꼭지점에 매달린 추처럼 대척지점을 왔다 갔다 하는 그의 역할놀이는 결코 위험하지 않은 유희이자 자기해방으로 향한 가면극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권여현의 작품에 나타난 차용된 이미지에 대해 마구잡이고 뒤죽박죽인 혼성모조라고 말한 그 혼성모방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번 전시의 핵심개념으로 통합구문(syntagm)과 혼성(hybridity)을 합성한 ‘신템브리드’란 신조어를 제시하고 있다. 어차피 그의 작품이 합성으로 이루어진 이미지공화국인 바에야 이 개념처럼 그의 작품의 특징을 압축한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적절한 것이긴 하지만 이 개념에 대한 부연설명을 함으로써 작업의 내용과 성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언어학자가 아닌 바에야 신템이란 전문용어에 대해 정의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신템(syntagm)을 패러다임(paradigm)에 상응하는 개념으로서 신템이 통합적 축(syntagmatic axis)에 의해 수평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면 패러다임은 수직적인 축이란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이다. 언어학에서 신템은 기의들(signifiers)이 상호작용하여 만든 조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사람은+밥을+먹었다’는 문장에서 각 단어들은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문장의 형태는 텍스트 속의 의미전체, 소쉬르가 말한 ‘체인(chain)’과 같은 것이다. 이 조합은 구문론적 법칙과 명시적이거나 비명시적인 관습의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데 언어, 문장에서 예를 들면 문장은 단어의 신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쇄된 광고는 시각적 기의의 신템이다. 신템은 종종 연속적인 것 또는 말과 음악처럼 일시적인 것으로 정의되지만, 공간적 관계를 표현한다. 공간적으로 통합된 이러한 관계는 드로잉, 회화, 사진 등에서도 발견되며 드라마, 영화, 텔레비전, 웹(Web) 등은 이러한 공간적이며 일시적인 신템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권여현의 작품만이 유달리 신템의 그 통합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혼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이미지의 교란, 더 나아가 의미의 분열과 교란이 일어난다. 나는 나일수도 있고, 나를 구성하는 주변의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이것이 호접몽처럼 다른 특정한 대상과 일치 또는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권여현의 작품은 그런 동일시를 거부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자고 하찮은 미물로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지상에서 인간의 군림을 위해 처단당해 마땅할 괴물(Demon)로부터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우주의 창조자(Demiurgos)에 이르기까지, 나른한 방관자로부터 적극적인 개입자에 이르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자기정체성을 해체하는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 미술사 속을 서성이고 그 속의 보물을 약탈한다. 그의 이러한 일탈은 원작이 지닌 통일성을 해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변형, 왜곡, 전도시키는 우상파괴로까지 나아간다. 피카소는 언젠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과 같은 미술사 속의 명작들을 자기언어로 패러디한  바 있다. 그것은 명작을 날조한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새롭게 쓰인 미술사이기도 하다. 미술사 속의 명작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보편성의 훼손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자. 어차피 예술가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야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위안을 느끼는 제멋대로인 존재들이니 말이다. 이렇듯 권여현 역시 미술사를 해체하고, 자기 식대로 고쳐 쓰고, 경우에 따라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독창성으로 위장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원작은 언제나 사진으로 버젓이, 더욱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밑맑은 고딕을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원작이 이미 모조된 것, 즉 품질 나쁜 사진의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원작을 교묘하게 위조했다면 이 작품들은 패러디의 정당성에 대한 비평적 논란이 아니라 표절의 시비에 말려 유명세를 탈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신템이 하이브리드되면서 그의 시각언어는 원작의 논리적 구조를 마구 뒤섞어버린다. 이 교란의 공범자로 그의 제자들이 동원된다. 그렇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주연, 조연, 엑스트라들은 그의 지도를 받는 학생들이다. 이것 역시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선생과 학생이란 어떤 점에서 위계가 너무나 체계적인 구조를 뒤바꿈으로써, 그 관계의 역전을 통해, 이 글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작가의 환상, 백일몽, 가위눌림을 해소하는 출구가 마련된다. 나는 고갱처럼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란 욕망은 그의 한 제자(고갱으로 분장한)가 증인으로 등장하는 화면에서 좌절되고 말지만 그것보다 더 거룩한 희생(황색의 그리스도로 분장한 작가의 모습은 따라서 작가의 욕망을 은폐하는 일종의 방어막이다) 뒤에 위장된 채 잔존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템브리드된 회화들은 작가의 다중심리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최종적인 귀착점은 언제나 나르시시즘이다. 아무리 페르소나를 바꾼들 자기에게로의 회귀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혼성모방된 작품들은 미술사의 명작들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 채 차갑고 건조한 언어로 그것의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의 승리를 위해 동원된 소재임을 알 수 있다. 원작의 언어가 해체된 그 공백을 파고드는 나르시시즘의 천년왕국, 그 속에서 그는 제왕이면서 동시에 시민이고, 주술에 능통한 신관이자 재능 있는 곡예사이며, 서사극의 극작가이자 음유시인이고, 감당하기 힘든 신탁을 내리는 아폴로이고 어쩔 수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저주받은 오이디푸스이다. 그러나 그 역할들은 이 이미지천국 속에서 결코 위험하지도 불경하지도 않다. 이 드라마의 각본은 그에 의해 언제든지 고쳐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꿈속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피해가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듯 그는 이 위험하기는커녕 오히려 유쾌하기 그지없는 역할극의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영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스스로 최면을 걸어놓았지만 결코 주어진 다른 역할에 몰입할 수 없는 견고한 자기애로 똘똘 뭉쳐진 결정체임에 분명하다.

 

 

 
 

 

 
 

vol.20060510-권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