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이해균 개인展

 

― 虛無(폐허) 또는 廢墟(허무) -

 

街路樹―길Ⅰ하드보드에 油彩 36㎝×25㎝

 

 

수원미술전시관 (제2전시실)

 

2005. 11. 22(화) ▶ 2005. 11. 29(월)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09-2 | 031-242-3647

 

 

街路樹 하드보드에 油彩 33.2㎝×24㎝

 

 

 

■ 현실계의 지평위에 뿌리내린 식물성과 조우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

 

형상의 리얼리티에 담아내는 추상적 정신성

이해균의 회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구상과 비구상 혹은 구상과 추상 등의 진부한 논의가 다시 필요한 것은, 형상을 추구하는 그의 작업 안에 정신성의 차원이나 내면적 표현 충동에 깊이 천착되어 있는 추상의 근원성이 여실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해균 작업의 구상성이 절대주의 추상 식의 근원적 정신성이나 추상표현주의 식의 내면적 심리 충동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이해균의 회화가 재현적 어법에 충실한 채 현실적 지평위에 기초한 객관적 리얼리티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즉, 리얼리티와 앱스트랙트는 서로가 극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해균의 리얼리티의 조형언어 안에 앱스트랙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술사에서 양자의 만남을 촉발시켜 온 것으로 혹자들이 평가해 온 반추상 양상의 작업과는 출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이해균의 ‘표현주의적 구상’ 작업은 따라서 조형적 특성이 아닌 ‘추상적 정신성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적 측면에서 리얼리티와 앱스트랙트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은 조형적 구상이라는 외형이 추구하는 정신적 추상이라는 내면과의 만남인 셈이다.

 

 

 

소나무 캔버스 유채 117㎝×90㎝

 

 

 

작가가 그리는 나무는 한결같이 재현의 대상으로서의 존재 위치를 넘어선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실제의 나무 형상을 작가의 의도와 감정에 따라 왜곡하고 변형해내는 작업 형식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기인하는 것이지만 외피적 변형 너머에 담아두려고 하는 정신이나 내면과 관계한 작가의 추상의지가 작품 안에서 작동하는 탓이다.

오랜 수령(樹齡)을 거치며 세상풍파와 맞서며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는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을 작품화하는 작가는 위풍당당한 거목의 외관 이면의 신수(神樹)라 불림직한 나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대상물인 나무와 배경이 서로 뒤섞여들면서 작품 자체가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내고 싶거든요. 말없는 그것을 영혼이나 신령한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대상으로 표현하고픈 것이지요.”

작가의 진술처럼 그가 모색하는 내면의 정신성은 장수한 나무들에게서만 찾아지지 않는다. 어느 도시의 이름모를 가로수나 키 작은 어린 나무는 물론이고 그가 다리품을 팔아 국내는 물론 남미, 인도, 아프리카 오지 여행길에 오르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자연이, 혹은 생활 주변에서 찾아지는 사소한 풍경이 모두 그의 작품의 소재가 된다. 나무를 둘러싼 자연의 풍경으로부터 한 도시의 구석진 자리에 이르기까지... 현실계 리얼리티의 모든 장이 그의 내면의 추상적 정신성을 모색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街路樹―길Ⅱ 하드보드에 유채 39㎝×27㎝

 

 

 

비동물성, 혹은 식물성 사유의 근저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유심히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그가 관심 기울이는 대상이라는 것이 실제적 움직임을 간직하고 있지 않는 비동물성의 자연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광물성을 포함하는 무생물의 것이거나 식물성의 생명체를 의미한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만유정령설(萬有精靈說)이나 애니미즘(animism), 그리고 물신숭배 같은 민간신앙적 요소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침략과 양육강식이라는 생존을 위한 동물성의 논리가 결여시킨 정신성을 비동물성 혹은 식물성의 생명체로부터 찾아보려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자연스러운 시도이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이해균의 작업은 이러한 동물성이 결여시킨 정신성을 구체적인 식물성의 차원으로부터 보편적인 자연의 체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확장시키면서 모색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로부터 풍경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비동물성으로부터 유발되는 그 정신성의 근저에는 여전히 식물성이 자리한다.

식물성이란 그 주체가 한 장소를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 곳이 싫든 좋든 뿌리내리고 살아남게 되는 강한 생명력을 드러낸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임시적 정착을 반복하며 유목을 나서는 동물성의 생명체와는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식물성의 한 개체는 자신이 생을 다하기까지 선택되어진 혹은 결정되어진 한 곳의 장소에 기초한 채 뿌리를 내린다. 그 뿌리가 자라면서 거대한 바위를 만나면 뿌리는 저항하지 않고 단지 그를 넘어서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따름이다. 그것은 저돌적이지 않고 나약해 보일 수 있는 성장이거나 눈에 띄지 않는 더딘 성장이지만 줄기를 튼실하게 하고 잎의 새순을 틔우며 가지를 생장시키는 강한 생명력을 담지(擔支)한다.

삶의 터를 운명적으로 부여받는 식물의 자체 발생학은 식물 주체를 선택의 의지나 의사 표명과는 철저히 상반된 단지 수용성(受容性)의 존재로만 정초시킴에도 불구하고 식물성에 대한 근원성과 더불어 이에 대한 작가의 사유의 근저를 명징하게 드러내 주는 기제가 된다. 그것은 작금의 전략적인 방식의 미술의 양태로부터 거리를 둔 채, 한국이라는 땅에서 그것도 천형과도 같은 예술가의 운명지어짐을 겸허히 수용하고 예술에 대한 작가의 체질적 감수성을 기만하지 않으려는 작가 이해균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창덕리 엄나무 캔버스 유채 162.2㎝×130.3cm

 

 

 

神樹 캔버스 유채 117㎝×91cm

 

 

 

삶의 중심에서 맞닥뜨린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

현실적 리얼리티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작품 안에서 그것을 이지러뜨려 배경과 삼투하는 화면으로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반응’과 상호관계하면서 그의 회화를 매우 표현주의의 양태로 만들어낸다. ‘일루전’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이와 병행하는 작가의 표현의지와 감수성이 일루전의 의미보다 더 주요해진 것이다. 그것은 현실계위에 올라선 추상적 정신성과 식물적 생명성이라는 주제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작가는 소품의 경우에는 ‘하드 보드’지 위에 유화물감을 올려 마르기전에 물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재현에 근간한 실제 스케치와 연계한 이미지들을 왜곡시키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만들어 낸다. 당시 대상을 파악했을 때의 느낌을 회상하면서도 창작시의 주관적 감정에 더욱 충실하면서 목도했던 처음의 대상으로부터 창조적인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또 다른 대형 캔버스 작품으로 연계되는 에스키스의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작품으로 마감된다는 점에서 작품 하나하나는 그에게 매우 소중한 창작 과정의 결과물이 된다. 대형 캔버스에 옮겨지는 스케치 또한 애초에 작가가 목도했던 대상체로부터 탈각되는데 작가는 이처럼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작법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유화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하드 보드’지 작업과 대별되게 그는 캔버스 작업에서는 마른 물감층을 스크래치 하면서 내면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도 그 한 예라 할 것이다.

 

 

 

鍊武洞 追憶 하드보드에 유채 40.5㎝×30.5cm

日沒과의 遭遇 하드보드에 유채 110㎝×79.5cm

 

 

그가 작품 제작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사진보다 목탄이나 볼펜 혹은 먹으로 이루어진 스케치를 선호하는 이유는 일차적 대상과의 만남조차 객관적 현시에 목적을 두기 보다는 주관적 해석을 거친 대상체로 자리매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계의 리얼리티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끝내는 현실의 객관주의를 넘어서서 작가의 주관을 거쳐 걸러진 예술 영역의 또 다른 리얼리티를 창출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또 다른 리얼리티? 그것은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그 어디선가 자리를 잡고 있는 표현주의의 양상으로 구체화된다. 현실에 기초하되, 신화적 모티브나 추상적 정신성을 강조하거나 간혹 바로크적 과장을 통해 화면의 단순성을 극대화하려는 이해균의 작업은 가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부를만 하다.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은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하면서 비평가 ‘프란츠 로’가 독일의 신즉물주의 회화를 지칭하면서 주창한 말이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보르헤스의 여타 저작들처럼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의 특성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현상 세계의 논리적 개연성을 적당히 무시하고 비사실적 환상을 부각시켜 비현실의 현실성을 창출하는 사실주의와 환상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인 문학 장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이해균의 회화에 있어 ‘비현실을 추상하지만 현실에 기초하는’ 신즉물주의 회화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괘(卦)를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일까? 광녀(狂女)가 머리를 풀어헤친 것 같은 모양으로 어스름 저녁의 시골 길의 가로수를 그리고 싶은, 달리 말해 나무라는 재현의 대상체를 영혼을 담은 주체로 등극시키고 싶은 작가 이해균은 현실과 비현실, 형상적 리얼리티와 추상적 정신성 사이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고민한다. 경계 모호한 두 지점에서 서성이는 작가의 최근 작업세계는 일견 이도 저도 못하고 작가를 괴롭히는 딜레마의 지점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기초하면서 비현실을 지향하는 이해균의 새로운 작업을 여는 의미 있는 지점이다.

보편적 일상 속에서 유독 재개발 구역, 폐허, 구석, 버려진 것, 진솔한 삶, 내밀한 감정, 진득한 정서, 허무, 죽음과 영혼, 정신성, 과거, 향수 등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의 체질적 감수성은 그의 회화를 ‘감흥을 주는 무엇’으로 정초시키는 전통적인 예술관을 견지해낸다. 그것은 작가 이해균이 폭압적인 동물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껴나 비동물성, 식물성으로 대표되는 생명성의 대상을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작가가 최근 모색하는 ‘삶의 중심에서 맞닥뜨리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향후 그의 작업을 전통적 예술관을 넘는 또 다른 차원으로 정초하는데 있어 의미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성호 | 미술평론가

 
 

■ 이해균

개인전 제1회갤러리 그림시 1997 / 제2회 경기도 문화의 전당 2000 / 제3회 경기도 문화의 전당 2001 / 제4회 경기도 문화의 전당 2002 / 제5회 인사아트플라자 갤러리 2002 / 제6회 수원미술전시관 2005

단체전

이영미술관 개관기념 초대전 2001 / 풍경회화의 모색전(환원미술관) 2002 / 화성아트페어 2회(경기 문화의 전당) 2001, 2002 / 전국 누드크로키 공개전(단원미술관) 2001 / 남한강 드로잉전(갤러리 LIZ) 2003 / 민족미술 수원전-오늘의 삶(수원미술 전시관) 2003, 2005 / 경기방문의 해 기념 특별전 가고픈京畿 秘境(경기도 박물관, 제비울 미술관) 2005

현 : 경기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미협회원, 경기구상작가회원

E-mail:leehg102@hanmail.net

 
 

vol.20051122-이해균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