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경  개인전

 

- 익숙한 것들에 대한 찬사-그 행복의 아이콘들 -

 

family planning

 

 

노암갤러리

 

2005. 6. 15(수) ▶ 2005. 6. 21(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33 노암갤러리 | 02-720-2235

 

https://noam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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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미학

막스 프리쉬(Max Frisch)는 그의 소설 ‘슈틸러(Stiller)'에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한 인간이 살아가야만 하는 그의 시대와 더불어 그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그 물음에 대해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게 단순한 격앙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심원한 문구를 접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영리하다면 다음과 같이 번안해낼 것이다.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 시대와 더불어,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이 격정의 문구가 가리키는 바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 세계를 인식시켜주는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이란 굉장히 명증한 것이어서 동물적 의식(animal consciousness)과는 그 종류를 달리한다. 그러나 그 의식을 시대에 연관지어 생각할 때는 문제가 사뭇 달라진다.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야말로 동물적 의식과도 같다. 왜냐하면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미래와 과거라는 벽에 가려져 맹목적으로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예측한 미래란 고작 영화 ‘2001년(2001)’에 나오는 기괴한 우주복을 입은, 모호한 성의 개체들일 뿐이다. 즉 1960년대의 관점으로 파악한 1990년대만큼 깨는 것도 별로 없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 시대라는 개념은, 그러나 ‘삶의 형식(form of life)'이 어떠했나 살펴볼 때 각 시대의 의식의 내용에 총체적인 색채가 수여된다. 시대는 단순한 연대기적 단위가 아니다. 단순한 시간의 단위 속에는 내밀함이 결여되어 있지만, 삶의 형식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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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경은 바로 이 삶의 형식에 대해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예술가이다. 막스 프리시의 대전제에 답하고자 노력하는 예술가이다. 소위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이니,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니,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주의’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모두 샤르트르의 ‘대자(pour soi)'나 ‘대타(pour autrui)'의 개념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현재에 대해서 생생한 경험을 하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현재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수여해 주는 사람들은 미래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의미는 지금보다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총체적인 채색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 로크가 ‘인간의 이성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의 서론에서 “이성이란, 마치 눈과도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여타 모든 대상을 보고 인지하게 해주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것을 거리를 두고 자신의 대상이 되게 하는 일이란 실로 기술과 고통을 요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기와 자기의 시대를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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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경은 서울 시내를 거닐다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용(transfiguration)시켜낸다.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을 다루는 사람들은 허다하게 많다. ‘로리타 렘피카(Lorita Lempicka)'라는 향수용기나 ‘다이아몬드 반지,’ 사과보다도 맛있는 ‘사과주스의 병’이 박윤경의 소재이다. 이쯤하면 팝아트와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시각적 경험은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예컨대 우리는 뒤샹의 ‘샘’이나 워홀의 ‘브릴로 박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소재는 주제라는 개념과 천양의 차이가 난다. 박윤경의 주제는 워홀이 말한 “사물을 좋아하는 방법”도 바바라 크루거가 말했던 “나는 쇼핑한다. 고로....”나 “얼간이가 되지 말라(Don't be a jerk)"고 강하게 외치는 여성 계몽적 진부함은 더더욱 아니다. 주위를 둘러봐라. 나를 나일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가 전무함을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미지는 넘쳐난다. 스피드나 물신이 판을 친다. 나를, 내가 사는 시대를 생각할 틈새를 주지 않는다. 세계는 풍요로워 보이지만 외롭고 허무한 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연상시킨다. 박윤경은 그 가벼움을 물리치기 위해 전면적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단순한 재현과 예술작품의 큰 차이는 “세계를 단지 보는 것”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의 차이이다. 소재와 주제의 차이이다. 단순한 재현으로서의 숨막히는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서 박윤경은 자기만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으로 사물에 온기와 애정을 불어넣어 의미를 담아낸다. 바로 그녀가 수십의 성상이 지나도록 매진해왔던 회화성(painterliness)의 투영이다. 그녀의 손과 눈과 노력과 영혼을 다 바쳤던 회화성의 투영이다. 이때 두서 없이 떠돌며 자기 정체성의 의미를 상실했던 세계의 요소들 그 모든 멤버는 박윤경의 예술세계라는 품속에서 고요하게 진정되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바로 이젤 페인팅이라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삶의 의미’들이 녹아든다. 그리고 박윤경의 예술세계가 무엇인지 더욱 극화시키기 위해 헤겔을 인용하고픈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

 

 

감기

 

 

헤겔이 설명한 정치의 네러티브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내용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 다음에는 아주 소수의 몇몇이 자유롭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게된다”와 같다. 이는 놀랍게도 예술의 네러티브와도 일치한다. 스스로 ‘거듭난 헤겔리언’이라고 선언하는 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네러티브에서 처음에는 재현예술(미메시스)만이 예술이다. 그 다음에는 몇몇이 예술이지만 각자간에 경쟁자를 제거하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타일이나 철학적 강제가 확실히 없어진다. 예술작품이 반드시 어떠해야한다는 길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역사를 “내적인 구조와 필연성으로 짜여진 역사”로 파악하는 헤겔의 관점의 요지는 이른바 ‘절대정신’의 구현과정이다. 외부와 ‘나(I)'라는 주체의 의식 사이에서 일말의 간격이 모두 사라져버린 상태를 일컫는 이 절대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역사는 그 끝을 맺고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데, 이를 가리켜 헤겔리언들은 역사후기(post-historical)라고 말한다. 역사는 강제와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고 외부세계와 나 사이에는 그 골이 깊고도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이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후기에는 절대정신이 구현되어있기 때문에 그 어떤 고통과 강제가 사라진 자유의 시기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절대정신이 얻어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중에 적어도 예술에서만큼은 절대정신이 구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예술에서만큼은 누구나 자유롭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달려달려달려! copy

 

 

또 한가지, 헤겔의 절대정신의 과정은 각각 예술, 종교, 철학이다. 예술이라는 발원지를 전부 이해해야만 비로소 종교라는 거대한 강줄기와 철학이라는 이름의 바다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없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역사후기의 예술은 다가올 인간사의 정치적인 것의 예고편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젠가 모든 이가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이 믿음만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흔치 않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아름다운 경구가 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더구나 모순이란 언제나 위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보다 삶이 훨씬 더 예술을 모방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신의눈은 믿을수없다 copy

 

예술이란 시대의 의식이라는 씨줄과 개인의 의식이라는 날줄이 짜여져 만들어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직물과도 같다. 개인의 의식이란 이른바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혼을 표시해줄 수 있는 공간은 예술밖에 없다. 이 영혼이야말로 예술을 설명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는 애초에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며 결코 배울 수 없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지오토(Giotto)는 복음서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세계를 보았고, 렘브란트는 살찌고 늙은 그의 아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흐는 별을 하느님의 목소리로 바라보았고, 로버트 매플소프(Robert Mapplethorpe)는 관능의 눈으로 남성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를 보는 우리는 예술가의 영혼으로 변용되어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았던 방법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때 ‘예술은 삶의 거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된다. 우리는 예술 속에서 예술가의 세계를 바라보았던 방법, 즉 영혼을 배우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 발견 속에서 감동하며 뉘우치고 행복을 얻는가 하면 분개하고 탄식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술을 일컬어 ‘영혼의 관상(the physiognomy of the soul)'이라 말했던 쇼펜하우어의 표현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두잉아트 copy

 

 

그리고 여기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소설 ‘여인의 초상’의 첫 단락을 수놓는 아름다운 문장과 같은 예술가가 있다. 그 첫 단락은 “인생에서 오후의 홍차라고 알려진 의식에 헌납되는 시간보다 기분 좋은(agreeable) 시간은 거의 없다”로 시작한다. 박윤경은 인생에서 가장 풍요하고 행복하며 긍정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오후의 홍차와 같은 마음을 지닌 예술가이다. 그는 우리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모든 것에 그 기분 좋은 마음을 부어준다. 시들했던 화초가 신선한 물을 만나면 생기를 차리듯, 우리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진부한 대상이라도 그의 손과 마음의 애무를 받으면 놀랍도록 행복의 생기를 누리게 된다. 예컨대 그는 신발을 만난다. 그리고 신발에게 이야기한다. ‘너를 신으면 넌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아.’ 이어 저 룸펜과도 같은 보잘 것 없던 신발은 놀라운 예술작품으로 변용되게 된다. 그리고 그 놀라운 메타포로 우리는 동화되어 우리의 신발을 바라보게 되며, 어느새 우리 역시 좋은 곳에 가볼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골치 아프게 난해해서 등을 돌리고픈 학술서적들이 있다. 이 기분 좋은 예술가는 그 책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휴... 읽을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아. 너를 그려서 극복 해야겠어!’ 그리고 나서 이 난해하고 골치 아픈, 온통 잿빛 무생물 같았던 활자 속의 어지럽던 유영들은 봄날의 옷과 꽃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세계로 바뀌어버린다. 이미 비어서 버려져야 할 맥주캔들은 그의 예술세계로 초대되어 친구들과의 유쾌했던 대화나 사랑의 분위기를 돋구어 주었던 고마움, 혀끝을 쏘았던 시원한 기억으로 변용된다. 이런 식으로 그를 둘러싼 모든 대상들은, 가령 진통제나 열쇠, 자동차의 휠이나 와인병들은 모두 따뜻한 의미로 변하게 된다. 박윤경은 말하자면 예술계의 마법사다. 해리포터가 ‘가장 두려운 것을 물리치는 마법은 무엇인가’를 찾아 과제를 해결하는 여정이라면, 우리의 예술가의 과제는 ‘삶을 통째로 사랑하는 마법을 보여주는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두통없이는 사랑도 없다

 

 

일상(everyday life)은 실재세계(real world)이다. 이 실재의 일상을 인내를 불허하는 참기 힘든 대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가령 작가 미시마 유키오나 조르주 바따유와 같은 사람들은 일상을 칼로 갈라야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인간이 본래 지녔던 초절적인 것이 회복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은 삶이라기보다는 어김없이 죽음에 해당한다. 또 뉴욕스쿨의 대부분의 화가들은 일상을 멀리했다. 예컨대 아돌프 고틀립(Adolph Gottlieb)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가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에게 예술이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입니다....상상의 세계란 자유로운 환상이며, 상식과는 정반대에 놓여있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도피하면서 자기들만이 볼 수 있는 세계를 꾀했으며 소위 영웅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들은 이 영웅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소수 몇 사람만이 입장허가를 받는 단단한 철문에 막혀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입장허가를 내린 예술가들도 있다.

 

 

 

마음을푸는 열쇠

 

 

“예술을 삶 속으로!(art into life!)"라는 외침을 그 기치로 삼은 사람은 소비에트의 위대한 예술가 알렉산더 로드첸코(Aleksandr Rodchenko)이다. 그는 ‘붉은 시월 과자 공장’을 위한 작품에서 미소를 예쁘게 머금고있는 소녀의 입 속으로 하나둘 사라지는 쿠키를 그래내며 그 소녀의 노래를 등장시킨다. “붉은 시월 공장에서 나온/ 쿠키를 먹어요/ 국가 식료품점에서만/ 쿠키를 사지요.” 그는 또 야채 기름에 대한 그림을 만들면서 “요리에 쓰는 기름/ 주목하세요 노동계급이여/ 버터보다 세배는 싸며/ 그 어떤 기름보다도 영양이 풍부해요”라는 문구를 전파하면서 소비에트의 전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예술혼은 언제나 “진정한 행복은 동이 트는 어스름에 살아있는 것에 있었다(Bliss was it in that dawn to be alive)"는 사회주의의 삶의 형식에 대한 찬사와 깨우침에 있다. 또 이는 폴란드계 미국인 앤디 워홀의 세계관에 깊은 원천이 되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드 쿠닝(De Kooning)이 동시대 대중과 정치로부터, 불만으로 가득한 현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기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소위 ‘신비하고 숭고한’ 이미지를 건져 올려 소수의 엘리트에게 봉헌했지만, 워홀은 현실로 뛰쳐나와 모든 이를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앤디 워홀이 남긴 많은 말 중에서도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가장 유명하다. “이봐, 난 여기가 좋은데!” “팝아트는 누군가 브로드웨이를 걸어오면서 순식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을 이미지로 만든다. 만화, 피크닉 테이블, 남자들이 입는 바지, 유명한 사람, 샤워 커튼, 냉장고, 콜라병, 이런 모든 것들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모던의 위대한 것들이다.” “팝아트는 사물을 좋아하던 방법이다.” 워홀은 이런 식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의 삶을 축복했다. 그리고 이들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제프 쿤스(Jeff Koons)는 그의 선배들에 대한 화답으로 “그 어떤 관람자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가 어디 출신임을 막론하고, ‘그래, 나 그거 좋아(Yes, I like it)'라고 반응하며 말할 수 있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만일 그들이 그럴 수 없다면, 이는 순전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멋진신발은당신을 멋진곳으로데려다준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박윤경은 “나의 작업은 지금의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즐거운 상상의 풍경을 담아냄으로써 지금의 시대를 읽고, 더불어 즐거움의 예술적 기능을 찾아보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속삭인다. 이 예술가의 속삭임은 보통 놀라운 것이 아니다.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나머지 가슴 저미기까지 한다. 감동적인 것은 비단 그녀가 로드첸코와 워홀, 쿤스로 이어지는 같은 선로에 놓여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헤겔의 정치 네러티브에서와 같이 “처음에는 합스부르크나 부르봉, 엘리자베스나 로마노프만이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이 소수의 계층으로 넓어지며 급기야 모든 사람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는 취지였다. 모든 일상의 대상이 놀라운 메타포의 예술작품으로 승격될 수 있을 때, 너와 나를 비롯한 모든 이가 부르봉 왕조나 엘리자베스 왕가의 자식과 같다는 메타포를, 박윤경은 우리에게 현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현실에서도 이 예술가의 메타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위대한 문호 괴테가 “매일 한결같이 자유를 쟁취해내는 자만이 자유를 얻는다(Nur der die Freiheit sich verdient, der taglich sie erobern muss)"고 말했듯이, 우리의 소중한 예술가 박윤경은 나날을 얻어내고 자유를 지켜낸다. 그것은 비단 혼자만을 위한 자유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선사하는 삶의 찬사이자 축복이기 때문이다.                        

 

 

물의모양은그릇이정하는가

 

 

■ 유쾌한 바라보기를 통한 역전의 미학 ■

 

이지영| 미술사

 

박윤경의 작품은 현대 소비사회 속, 흔히 접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원형 적인 것들을 담는 시각언어로 설명된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가벼움과 즐거움, 밝음과 위트와 같은 긍정적인 뉘앙스를 맑은 고딕으로 자신을,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을 대변한다. 사실 언뜻 스쳐보았을 때 그녀의 작품들은 팝 아트의 그 것과 유사해 보인다. 현대 광고 그리고 상품 이미지들로 구성 된 화면은 분명 팝(Pop)적인 익숙함을 맑은 고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녀는 작품에서 반복, 차용, 복제로 대표되는 -지극히 팝 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표현들과 산업 안료들을 연상시키는 원색의 색채들을 이용하여 팝 아트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소비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체취를 풍기며 작가가 곁들여 놓은 간단한 제품설명과 함께 스스로를 자신만만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이 자명해 보이는 증거가 있다 손 치더라도 그녀 작품을 팝 아트라는 이미 완결된 이름 아래 이해하기에는 주저가 따른다. 그렇다 하여 시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목을 끌고있는 포스트 팝 적인 증후군 정도로 설명하는 것, 역시 망설여진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들과 다른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차이는 다름아닌 그녀 작품에서 비롯되는 내밀한 목소리로부터 기인된다.

 

 

뺏지의 힘

 

그녀의 화면에서는 차가운 미소가 아닌 미묘한 열기와 자성적 목소리가 느껴진다. 체질화 된 소비와 발랄한 감각주의, 유치함과 세련됨, 가벼움과 즐거움, 나긋함과 달콤함과 같은 다양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 교차를 이루며 관람자에게 미묘한 유쾌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홈쇼핑 잡지 광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기한 일제 다용도 가위, 친구의 마지막 처녀파티에서 마신 와인, 그리고 그녀의 가방 속 휴대용 두통 약 등 일상 속에서 쉽사리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은 작가의 화면 속에 또박또박 시각화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로지 시대를 연기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목적으로 작가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니다.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부정하는 듯 끊임없이 복제되고 유통되는 현대사회의 소비상품 이미지들을 담아내지만, 박윤경은 그것이 오히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설적 제스처로 환원되기를 희망한다. 백화점 1층 잡화 코너에 가면 구입할 수 있는 사과모양 향수용기(Lorita Lempicka)와 대형 할인 마켓에서 방금 집어 온 듯한 무가당 사과 주스 병 등, 화면 속에서 각기 반복되며 등장하는 이것들은 현대 사회 속 소비의 체질화 된 리듬을 경쾌하게 노래한다. 그러나 작가는 워홀(Andy Warhol)이 애용한 '다다익선(多多益善)'과 같은 소비 선(善)의 계명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사과보다 더 향기롭고, 더 맛있는 이 상품들은 그녀 개인의 선택과 취향의 서술을 우선시 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값싸고 비개성적인 상품 이미지와 소비 사회 시스템에 관한 뻔한 떠벌리기를 뒤로 한 채 작가는 이들을 자신의 일상에 담갔다 꺼내 놓는다. 살아가는 지금,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삶의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 '나를 나이게 하는' 그 무엇이 묻어나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제스처에 무게를 실코자 함일 게다. 그것이 비록 고귀한 그 무엇이 아닌 지극히 세속의 냄새를 풍기는 소비 상품의 이미지일 지라도... 그녀가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뒤집어 놓으려는 것은 세상을 향한 바라보기의 방식이다. 만약 차용과 복제를 통한 틀 깨기가 현대 그림 그리는 이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라면, 그녀는 이 모순 된 상황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되려 즐겁게 받아들여 보려는 심산이다. 작가가 그리고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삶을 살아가는 세계는 소비하기에 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감각적으로 즐기기 위해 소비하는 시대이다. 이미 소비사회를 체질화한 채 살아온 그녀가 제시하는 예술이 상품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삶의 리얼리티'를, 그리고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환원적 예술의 또 다른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아코올을 타고

 

 

현대는 넘치는 이미지들로 대변된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를 기호가 실재를 대체해 버리며 원본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진 채 표피적인 이미지들만이 표류하는 하이퍼리얼(hyperreal)한 세계로 설명하고 있다.   거대한 초고속도로망의 발전을 맑은 고딕으로 한 미디어의 침투로 인해 수많은 시뮬라크르(Simulacres)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시뮬라시옹(simulation)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우리말로는 가장<假裝> 혹은 위장으로 번역되기도 하나 다른 유사어와의 혼동을 막기 위해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실제 대상을 모방하고 실제 대상을 모사한 그 이미지를 재차 모방하는 과정들의 나열, 그 부재한 대상을 대신한 이미지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 질서: 이미지, 모방, 위조의 과정이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를 하기'로 이해될 수 있다. 들이 매일 승전 보를 울리고 있는 그러한 시대인 것이다. 그 속에서 작가들은 이들과 구별되는, '그 무엇'을 제시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변화해야만 한다는 열병을 앓고 있다. 가장 부차적인 것과 가장 평범한 것, 그리고가장 외설적인 것 까지도 미학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가능한 오늘날, 쏟아지는 현란한 이미지와 상품 물질들이 범람하는 일상 속에서 이들을 거부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헤엄쳐 보자고 작가는 당당히 권한다. 무엇이 나의 것인지, 무엇을 그려내야 하는 지 때론 아득해 지지만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다양함과 풍요로움에 대한 희망으로, 순간순간 우리 앞에 놓여지는 온갖 것들을 새로운 행복의 아이콘으로 변화시켜 보자는 얘기다. 그와 같은 작가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택한 마법은 '스스로 그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 마치 작은 물고기들이 커다란 상어를 만나면 군집을 이루어 보다 더 큰 물고기의 형상 물로 상대를 제압하듯이 말이다.

 

 

소화불량

 

 

■ 침묵을 넘어 들려오는 그녀의 사정(事情) ■

 

그렇다면 두려움을 거두기 위해 택한 마법, 즉 스스로 대상이 되어 유쾌한 유희를 즐기는 작가의 화면 겹 아래 숨겨 진 의중은 무엇인가. 그녀는 현대 소비사회가 제공하는 풍요로움, 망막에 현존하는 시각적 유포리아 속에서 앞선 화가들의, 그리고 우리 시대 화가들의 정체성 찾기의 고민을 어찌 풀어내고 있는가? 오로지 긍정적인 시각적 뉘앙스와 태도 만으로 자신이 실존하는 사회가 그러함을 온전히 받아들인 채, 더 이상의 고민은 접어두기로 한 것인가? 이 문제를 풀어내는 단초는 '자신의 일상을 그림 그리는' 작가의 제스처로 소급된다. 그녀는 온기를 지워버린 소비사회의 즉물적이고 피상적인 소비상품을 손쉽게 복제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어제 겪었고 오늘 사용하며, 내일 사야 하는 그녀의 소중한 일상 용품들을 붓으로, 손으로 공들여 그려내고 있다. 그 같은 그녀의 그림을 즉자적인 시각으로만 읽고 돌아서기에는 남겨질 여운이 너무 길다. 이는작가가 자신의 화면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는 나름의 사고방식을 이야기 하고자 함일 게다. 다채로운 시각의 맞물림 속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것은 현대 소비사회의 환원적 리얼리티, 혹은 살아가는 젊은 화가의 정체성에 대한 갈망. 또는그리기를 지속하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고민과 즐거움 등의 진솔한 독백과도 같은 것들이다.

 

 

아픔에 장사없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은 익숙한 것들을 맑은 고딕으로 하기에, 일상에 대한 유쾌한 공명을 일으킨다. 즉 작품 속 피상적 소비 이미지들은 작가의 일상, 즉 내러티브라는 변형된 요소의 첨가로 인해 일종의 색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관람자로 하여금 주위를 기울이게 한다. 박윤경은 자신의 화장대에서 막 꺼내온 듯한 화장품들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 위를 물감으로 신중하게 발라놓는다. 이들 작품은 한 눈에 보아 분명하지만 동시에 수수께끼 같은 면을 드러낸다. 알록달록한 캔디컬러의 작품들은 한없이 가벼운 표면을 보여주지만, 그 표면에서 작가의 끊임없는 흔적 역시, 충실히 드러내기에 마냥 가벼울 수만은 없다는 얘기다. 캔버스 표면 위에서 기대했던 팝 아트 적 침묵은 작가의 감수성과 직관의 표출로 대치된다. 덕분에 작품의 비개성적 소비상품 이미지들은 개인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며 감성적인 촉각을 양껏 자극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셈이다. 그 결과 캔버스 안 차용미술의 차갑고 중성적인 비판성은 그녀의 의도아래 한층 미묘한 열기를 내뿜게 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회화적 표현'이라는 중요한 작가 감수성의 흔적이 면밀히 드러난 까닭이다.

 

 

여인의 향기

 

 

짚어 보건대 박윤경은 예술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끌어내고 푼 솔직한 태도를 우선시 한다. 그러하기에 작가의 고유한 서술 체로 사랑, 행복, 고통, 존재 등과 같이 삶과 관련 된 문제를 그려 넣는 작업을 꾸준히 전개 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업실에서 까먹은 초콜릿과 그날 처음 뚜껑을 열은 물감이 함께 캔버스에 그려지고 그녀 취향에 따라 설탕조절이 가능한 인스턴트 커피믹스, 친구들과 함께 콜라를 섞어 즐겨 마시는 말리부 럼 역시 당연히 그녀의 작품 위에 오른다. 캔버스 전체가 행운의 숫자 추첨 통으로 바뀐 그녀 화면에서는, 알고 보니 사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는 로또 복권에 얽힌 그녀의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다. 반짝이는 외모만큼 화려한 행운을 선사해 줄 것 만 같은 추첨 공들은 인생역전을 꿈꾸며 돈이 주는 행복이 제한적일 수 있지만 절대적 일 수 있다는 개인과 사회의 공통된 화두를 말한다. 단 한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이 검색가능 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답게 작가는 새 작업실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이용한다. 그 같은 작가의 경험은 서울의 구획 지도를 캔버스 위 작품의 소재로서 재 등장시키고 있다. 실제로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은 따로 구별하여 채색하였다'는 작가의 설명을 곁들인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흡사 일일이 발로 다니며 그렸다는 대동여지도의 현대판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부동산을 통해 체득한 것은 지역의 표면적 모양을 넘어 무형의 돈으로 환산되는 삶의 차이다. 또한 작가 '자신'으로 대변되는, 지금 서울을 살아가는 너와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현대판 대동여지도는 그녀의 일상의 경험에 의해 강북과 강남으로 크게 나뉘며 지역에 따라 우습지만 너무도 당연한, 즉부동산 가격으로 대변되는 차이의 개념을 드러내는 셈이다. 이 같이 박윤경의 작품들은 해야 할 이야기도, 들어야 할 이야기도 너무 많다. 그러하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해석이 어디로 열리든지 간에 그녀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투과해야 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마를 즐기는방법

 

 

그녀의 또 다른 작품 타이레놀 시리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작가의 작품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타이레놀은 코카콜라와 같은 소비사회의 추상적 아이콘으로도 읽혀지지만 동시에 여자인 작가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지극히 구체적인 일상의 단편이기도 하다. 화면 위 타이레놀은 이제 인류의 병을 극복하기 보다는 소비의 영토를 정복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제약 산업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나 비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 그녀가 남자친구와의 실갱이 끝에 물 한 모금과 함께 목으로 넘겼던 바로 그녀의 가방 속 타이레놀이다. 두통 없이 사랑도 없다고 믿는 그녀에게, 화면 위 겹겹이 쌓인 타이레놀은 삼킨 개수만큼 늘어난 그녀 삶 속 사랑의 환원적이며 구체적인 증거물인 셈이다. 만약 그녀의 타이레놀이 소비사회의 비판적 반영으로 또한 해석 된다면 그것은 곧 '그녀의 삶'이라는 선행조건 아래, 현대 사회의 리얼리티를 투영하는 환원적 매개물로서 여겨지는 것이 수순일 것이다.

 

 

지식의 권력

 

이같이 사연이 있는 타이레놀은 작가의 의도 아래 고색창연한 액자 프레임과 함께 전시되면서 다시 한번의 말 걸기를 시도한다. 고전의 아름다운 모나리자에게나 어울릴 듯한 과장된 표현의 금색 사각 프레임과 유치한 듯 쌓아 올려진 현대의 타이레놀 간 미묘한 시각적 충돌은 관람자의 시선을 다시 한번 끌어 모은다. 작가가 제시한 이 특별한 프레임은 스쳐 지나칠 수 있는 관람자들의 무심함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작가의 재치 있는 기획이다. 이 화려한 사각의 프레임은 작품의 표면에서만 그림보기를 멈추지 말고 그에 내면으로 들어가도록 독려하는 모종의 통로인 셈이다. 그저 가벼운 소비 상품 이미지로서만 읽혀버릴 수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은 과거로부터 '의미 있음'을 증명해 온 고전적 프레임으로 인해 그 역시 어떠한 '의미가 있음'이 암시되어 진다. 차용된 이미지의 차가움을 넘어 중성적인 화면 겹 아래에는 작가의 숨겨진 삶과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만약 작가가 타이레놀로 대변되는 '사랑의 중요성'이란 전통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면 고전의 사각의 프레임은 어찌 보면 작품의 심상(心象)과 더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찬란한돌, 영원한 약속의 징표

 

예술에 있어 사각형의 프레임은 '예술'의 경계를 지키는 신성한 틀이자 그것에 의문을 제시하는 불순한 성지이다. 그 안에서 만이 작가가 제시하는 상품들은 타이레놀 혹은 롤리타 렘피카 향수와 다른 어떠한 것이 되며, 예술적 컨텍스트 안에서 미술작품이라는 화려한 가장행렬이 가능하게 된다. 자신들의 활동으로부터 성스러움을 추방 하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신성화 되었던 팝의 과거를 추억해보면 작가의 이러한 행보는 그러한 예술적 태도마저 차용될 수 있는 '현대 미술'의 유쾌하지만 날카로운 거울보기로도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커플

 

 

그리기를 멈출 수 없는 작가에게 있어 '그림'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여행이다. 그 여행 길 위에서 세상이 내가 될 수도 또한 내가 세상이 될 수 도 있음을 그녀는 경험한다. 그녀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저 지나쳐버릴 일상 이었을지 모르나 그녀가 불러 주었을 때, 그것은 다가와 행복의 예술이 된다. 작가의 삶을 거친 이들 모두는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것과 같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인용

다시 눈을 씻고 박윤경의작품을 바라본다. 작가의 예술은 일종의 숨은 행복 찾기 와도 같이 느껴진다. 위대한 작가가 아닌좋은 작가가 되고픈 그녀로부터 '삶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유쾌한 희망이 존재함을 찾아 낼 수 있기에... 자신으로 출발한 긴 여정에서의 그녀가돌아온다면 또 어떠한 이야기를 캔버스 위에 풀어놓을지 오늘도 나는 기다려진다.

 

 

 

 

 

 

 

 
 

 

 
 

vol.20050615-박윤경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