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룡 개인展

 

- 공간 파괴자 : 공간 생성자 -정진룡의 유토피아 -

 

 

 

관훈갤러리

 

2005. 4. 27(수) ▶ 2005. 5. 6(금)

opening 2005.4.27(수)pm6: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 전화: 02-733-6469

 

 

   

 

 

■ 철저한 형식비판을 통한 끊임없는 반성과 도전의 미학 ■

 

김 미령 | 관훈 갤러리 큐레이터

 

아름다움(美)을 굳건히 소유하고 있는 그것은 예술이렷다! 영속적인 참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예술이렷다! 그것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이며 공포의 외마디 비명으로 울부짖으며 매번 패배하고 마는 것이 예술가렷다! 매번 결투를 신청하고, 신청해서, 신청해도 응수해주는 아름다움(美)은 승리의 여신이며, 그녀를 향한 사랑과 증오로 불타오르는 정신을 가지고 덤벼드는 예술가는 수도 없이 패배의 고배를 마신 패잔병이다. 그는 무한한 하늘과 바다 속에 자신의 시선을 잠기게 하고 더 없는 환희를 느낄 수 있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그날을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예술가이며, 현재 내면의 울림과 떨림으로 치를 떨고 있는 그가 예술가이다.

다소 격정적인 문장으로 서문을 여는 이유는 필자가 정진룡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느낀 감정이 피상적이나마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정진룡의 예술 세계관은 끊임없이 예술의 형식에 대해 고민하면서,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여 나아가는 아도르노의 예술의 유토피아적 특성과 닮아 있다. 즉 그는 예술작품이란 현실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세계와 예술 간의 괴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부정하여 특정상을 형성하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나아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아도르노의 이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고 있는 작가로 보인다.

 

 

 

 

 

“나는 작품의 원본을 작게 그려내고 그것을 다시 디지털 기계로 수천 배로 확대시키는 작업을 선택하였다. …… 이렇게 마련된 이미지의 맑은 고딕위에 나는 붓질을 가하여 부분을 삭제 혹은 첨가하거나 이미지를 삽입하고 혹은 문자를 드로잉 하듯 써 넣는 행위를 가한다.

- 작가의 글 中 에서 -

 

그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형식에 관한 탐구이다. 그가 작업노트에 적고 있듯이, 우선 원본을 작게 그려낸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세밀한 탐구로 보여 지며, 그것을 다시 디지털기계로 수천 배로 확대한다는 것은 그 이미지의 현상적인 측면의 극대화로 보여 지고 그러한 무한 증식은 제 2의 비판적 요소를 가미시키는 것으로 보여 진다. 마지막으로 붓질을 가하여 부분을 삭제하거나 첨가하여 이미지를 삽입하는 것은 일련의 작업에 대한 본질과 현상에 대한 제3의 부정의 작업이라 보여 진다. 이러한 정진룡의 마무리 작업은 그의 전체 이미지를 아련히 보이게 만들면서 전체 이미지에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하여 그의 이미지는 단일하고 고정적인 의미를 가진 기표가 아닌 다수의 불확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그가 그리는 도시는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도시도, 그가 그리는 성전(聖殿)은 실재하고 있는 성전이 아니다.

 

 

 

1. 고해성사 -성전(聖殿)->성전(聖典) ->성전(聖傳)

 

“할머님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 왠지 모를 죄책감과 함께 할머님께 죄송스럽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님의 시신을 보았죠.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너무도 무서웠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할머님이 다니시던 성당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리곤 속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진룡의 성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종교의 성전이 아니다. 그가 고백하고 있듯이, 할머님과의 기억이 얽혀있는 성스러움이 깃든 성이고, 할머님의 죽음 앞에서 엄숙하게 마음을 속죄하는 고해성사실과 같은 공간이며, 이러한 그의 마음을 성문화된 법으로 보관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공간이다. 따라서 거대한 화폭에 색채, 명암, 채도의 구분이 거의 없는 흑백의 모노톤으로 처리된 그의 성전 내부의 이미지는 대상물과 이를 에워싸는 배경이 상호 침투하여 장중한 아우라를 만들어 내어 정진룡의 고해성사를 전하는 전령의 기능을 맡고 있다고 보여 진다.   

 

2. 비판적 사유 - 가상도시(假像都市) ->가상도시(假象圖市) / 검정 도시 Vs 하양 도시,  

 

“도시는 도시이되 작품 속의 도시는 어디에도 존재해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 관객은 그것을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임을 느끼며 이러한 공유의식은 나의 이미지를 통해 공감된다. 나는 이것을 ‘假象的 都市象’이라 말한다.”

- 작업 노트 中 -

 

도시는 그가 서술하듯이 현상적으로는 그가 살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현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고 느끼고 향유하는 도시는 그 자체의 본체를 알아가는 과정의 흐름 속에서 차이와 이견을 낳는다. 비단 이것은 도시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정진룡이 그려내는 도시는 눈에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거울 속에 투영된 듯한 이미지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진룡이 그려낸 도시(都市)는 관람객과 그에게 도시(圖市)가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도시 이미지를 매개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정체성 찾기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내가 스스로 나의 회화형상을 통해 사유하는 것은 도시적 삶이고 인공의 수단에 대한 반성이다.”

-작업 노트 中 -

 

 

 

 

 

그가 취하고 있는 소재들은 그를 키워오고 성장시킨 도시 공간이다. 그러나 이젠, 그에게 자양분이 되었던 도시에서 비판적 시각의 날을 들고 서있는 그의 모습이 발견된다. 이러한 그의 비판의식은 작품이 사회구조와 상동적인 측면을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와의 괴리적 측면을 내포하고 그리하여 이러한 모순적인 현상이 충돌과 갈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관한 날카로운 지적이라 볼 수 있다. 검정도시에서 그는 검은색 맑은 고딕위에 도시의 전경을 뭉개버리고 팽창되어진 빛의 이미지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가 보여주는 검정도시는 태초의 우주 공간의 카오스 상태를 연상시키며 도시의 이미지를 지워버린다. 반면에 하양도시에서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깨끗하고 정리된 한낮의 대도시 공간과는 사뭇 다른 처연하고 쓸쓸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하양 빛을 밝게 내고 도시의 위력을 뽐내고 있어야 할 도시의 모습은 뿌옇게 먼지로 흐려진 혼탁한 대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정진룡의 작품 즉 일련의 도시연작들과 함께 앞서 밝힌 성전의 이미지는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존재와 실체에 대한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과정으로 반성과 도전의 미학으로 보여 진다.  

3.  

현대 물리학과 천문학의 탐색은 끝이 없어 보인다. 이 둘의 탐색과정은 서로 다른 방식 즉 한쪽은 원자 현미경을 가지고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고 다른 한쪽은 천체 만원경을 들고 밖으로 밖으로 파고들어 결국 그들은 똑 같은 공간 속의 진리를 본다. 굳이 물리학과 천문학을 들먹이면서 정진룡의 작업을 논하는 것은 다소 거창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는 그가 보는 세계에 대한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오늘도 수없이 기존의 공간을 파괴하고 수없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그의 예술의 유토피아를 위한 도정의 길에 서있다.

 

 

 
 

 

 
 

vol.20050427-정진용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