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진 개인展

 

 

 

갤러리 아트사이드

 

2005. 4. 27(수) ▶ 2005. 5. 10(화)

Opening 2005.4.27 pm5: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0 | 전화: 02-725-1020

 

www.artside.net

 

 

 

 

■ 황용진의 풍경: 생명력과 희망의 공간 ■

 

"비극과 그 비극이 나타내는 우울에 대해서 말하는 것, 일상생활의 단조로움과 간헐적으로 번쩍이는 그 돌파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 그리고 하찮은 존재의 즐거움을 인식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탐구의 장의 열어주는 것이다."   

황 용진의 회화는 일상의 "간헐적으로 번쩍이는 돌파구"를 찾는 데서 시작된다. 그가 현대인의 부조리, 위선, 불신에 대해 고민할 때, 시골의 순박한 소들을 보며 인간의 위선으로부터 동물의 순수함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그리고 그 소들이 거닐 던 언덕, 들판, 꽃들을 더 자세히 보게 되었을 때, 이러한 순간들은 황 용진에게 자유와 해방의 순간들이다. 무엇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걸까? 그가 추구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황 용진의 회화는 아마도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거대구조,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의 그림은 소외된 일상, 보잘 것 없는 존재,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로부터 풍요로움을 끌어내고 있다. 황 용진의 이러한 소외된 일상에 대한 주목은 새로운 휴머니즘, 즉 '삶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삶의 전환'을 시도하는 황 용진의 회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리기’ 만을 지속해온 그의 선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그리는 내용이다. 그가 '그리기'를 계속해 온 이유는 '회화'가 단순히 미술의 전통이어서 라기 보다는, 이미지 탄생의 '중심 혹은 근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이미지 생산의 근본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생산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미술 실천의 영역을 극대화 시키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면서 오늘날 회화를 위협(?)하는 것은 바로 이미지들의 대량 생산이다. 물론 와홀은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며 미술의 새로운 도약에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회화는 이미지의 다산과 맞서서 회화의 가치를 끊임없이 재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뤽 튀이망스라는 벨기에 화가는 인터뷰에서 그의 '회화'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그는 "회화는 미술의 근본이 되는 가장 개념적인 이미지를 생산한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 회화는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회화를 더욱 더 중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오늘날 흥미로운 사유가 전개되는 곳은 바로 '주변'이기 때문이다." 이라고 말한다. 뤽 튀이망스는 중심보다는 주변에 주목하고 주변적 사유에 관심을 갖는 현대사회의 지배적 흐름과 회화의 현주소와 연결하며, 그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이 컨텍스트에 기반을 두며 다양한 매체사용에 집착하는 상황에서, 회화는 ‘주변’이라는 개념을 사유하고, 그것을 인식하게 하는 '저항'의 가치를 의미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회화만을 고집해온 황 용진의 선택이 그 의미를 갖게 되며, 물론 여기에는 그가 그리는 내용 또한 잊혀진 가치와 소외된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회화가 더욱 더 진실할 수 있다.

 

 

 

 

황 용진의 초기  회화는 낮보다는 밤, 행복보다는 절망, 즐거움 보다는 고통을 담고 있다. 이 시기 그가 그려낸 인간은 일상적 삶이 제공하는 인간의 야만성, 공격성, 위선을 반영하는 화신이며, 이들은 매 번 뭔가 알 수 없는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아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감과 불안감은 90년대 초에 이르면서 인간의 공격성과 야만성 그리고 위선을 비판하는 거대한 ‘눈’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된다. 욕망하는 기계로 전락한  현대인은 황 용진의 그림에서 감시와 통제의 현대사회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파괴한다. 이 시기 황 용진의 회화에 나타난 해체적 형태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무의식과 혼란 거기서 오는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곧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갈등에만 집중하지 않고, 삶의 또 다른 가치들에 주목한다.1994년부터 황 용진은 시골 작업실 주변의 황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실 주변에서 만난 황소들의 눈망울에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황소들의 검고 둥그런 눈망울에서 현대인이 상실한 순수함, 소박함, 평온함을 보았다. 동시에 소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은 인간의 모습을 스스로 비춰 볼 수 있는‘거울’이 된다. 이 순박한 소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우직하지만 순수한 황 용진의 ‘소’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부질없어진다. 위선의 가면을 벗고 겸허한 자세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때, 욕망의 그늘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된다. 최근의 황 용진의 풍경 시리즈들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을 알리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한 황 용진의 풍경 시리즈에는 인간 이전의 삶을 연상하게 하는 태초의 풍경과 시사 잡지에서 오려 낸 현대 사회의 단편들이 공존하고 있다. 아직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이 풍경들은 현대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다. 황 용진의 유토피아는 기억과 무의식이 혼재한 이 세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삶의 탄생을 예고하는 희망의 풍경인 것이다.

 

 

 

 

 

황 용진의 회화는 가장 주변적 사유를 다루면서 가장 개념적이고 근본적인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생명력', '삶', '순수성', '희망'이라는 개념의 이미지들이다. 이 번 2005년 개인전에서 만날 수 있는 황 용진의 회화는 우리에게 가깝게 있지만 미처 인지할 수 없었던 환경, 개발의 회오리에서 아직은 타격을 받지 않은 자투라기 땅, 밤과 낮의 경계인 새벽과 해질녘이라는 짧은 순간들을 다루고 있다. 작업실 귀퉁이에서 소리 없이 자라고 있는 잡초 풀 몇 오라기가 그의 회화에서는 강인하게 뻗어가는 생명력의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들판의 나무들과 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연약한 꽃 한 송이는 생명의 위대함을 고하듯 거대하게 확대되어 캔버스 전체를 꽉 채우며 삶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낮과 밤의 경계선에 있는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태초의 땅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풍경들은 새로운 삶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황 용진의 풍경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풍경은 바로 인간을 위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황 용진은 이 번 개인전에 캔버스의 풍경을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작가는 자신이 계속 해온 2차원의 풍경을 확대 전사하고 프린트하여 공간의  맞붙은 두 벽을 꽉 채워 나간다. 마주 보는 두 벽에  가느다란 선들의 풍경 형태는 바로 앞면의 구체적인 풍경과 대비되며 공간 전체를 풍경-환경으로 전환시킨다. 관객은 이 공간에서 풍경을 감상한다기 보다는 풍경 속에 존재하게 되며, 이 풍경을 실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서 체험하게 된다. 또한 이 ‘풍경-환경’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네온 싸인으로 만들어진 단어들이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게 된다. 이 단어들은 태초의 환경에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 나가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 지에 대한 방향제안을 하는 길잡이와도 같다.

 

 

 

 

 

이 번 개인전에서 볼 수 있는 황 용진의 이 월 프린팅 작업은 작가가 그 동안 지속해 온 회화와 판화 작업의 연결이며, 또 그 연장선에 있다. 황 용진의 풍경은 여러 겹의 판화 잉크로 두텁게 칠해진 평면을 손으로 지워 나가면서 서서히 그 형태가 드러나게 된다. 이 과정과 방법은 단순한 회화 테크닉이 아니다. 바로 황 용진의 내면의 세계를 외화 하는 중요한 과정을 의미한다. 이렇게 탄생한 황 용진의 풍경은 또 다시 확대와 전사 테크닉을 통해서 풍경에서 환경으로 확장 전환된다. 풍경에서 환경으로의 전환은 소박하고 겸허한 풍경을 만들어 나가며 희망과 생명력이 넘치는 인간의 환경을 제안하는 황 용진의 회화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이 풍경-환경 속에서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에 대한 질문 한다 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이 환경에 무엇을 채워나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이고,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지, 또 나아가서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황 용진의 풍경-환경은 각박한 현대사회 속의 작고 소박한 생명력을 공급하는 일종의 ‘바이오 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김성원 | 미술비평

 

 

 
 

 

 
 

vol.20050427-황용진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