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찬 展

 

레몬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5. 7. 9(수) ▶ 2025. 8. 1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48-1, 2층 | T.02-797-7893

 

https://www.willingndealing.org

 

 

 

 

레몬

우리는 노란 빛깔의 우둘투둘한 껍질과, 즙이 많은 과육, 시고, 달고 쓴 맛과 똑 쏘는 향기를 가진 레몬을 알고 있다. 레몬에 대해 찾아보면, 레몬은 기억력과 기분을 개선하고, 노화 억제, 피로 회복과 피부에 좋은 것으로 나온다. 영어권에서는 속어로, 쓸모없거나 흠이 있는 물건과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유래한 관용 표현으로 “삶이 너에게 레몬을 줄 때,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가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레몬은 바니타스 장르에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삶의 무상함과 함께, 달고 쓴 삶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윗 문단의 ‘레몬’을 ‘이미지’로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이미지는 기억력과 기분을 개선하고, 노화 억제, 피로 회복과 피부에 좋은 것으로 나온다.” 다시 반복해서 풀어 쓴다면, 조금은 빗나가지만, 이미지는 기억을 매개하고, 감상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보는 이를 유혹하고, 선망하게 하며, 정체성을 조형한다. 서구권에서 이미지는 플라톤 이래로 실재보다 저급한 것으로, 쓸모없거나 흠이 있는 것으로 취급된 역사가 있다. 한편으로, 이미지의 역사는 죽음과 망각과 함께 시작한다.

이미지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기를 결심한 시절의 나를 매혹했었다. 그림 연습을 위해 만화대여점에서 잡지를 빌려 광고 이미지 등을 따라 그렸다. 그 이미지들은 나를 매혹했고, 후에 컴퓨터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이미지를 닥치는 대로 컴퓨터에 저장하곤 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생긴 후에는 늘상 그것을 가지고 다니며 이런저런 사진을 찍곤 했다.

 

 

 

 

스마트폰과 검색과 SNS가 일상이 된 지금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간혹 사진을 찍어도 그것은 내가 특정 시간과 장소에 있었다는 표시일 뿐, 이미지 수집을 위한 활동이 아닐 것이다.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처음 보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몇 개의 관심 범주 안에 머문다. 그마저도 조금 후에 다른 이미지를 보게 되면서 눈 앞에서 망각되는 일이 다반사다. 체화되지 못한 이미지는 매끈하게 미끄러진다.

망각은 필연적인 반면, 기억은 간헐적이고 우발적이다. 간혹 흘러가는 이미지 속에서 그것이 보여주는 것과 다른 이미지와 연상이 상기될 때, 이미지는 흐르길 멈춘다. 가끔씩 사적인 이미지를 모아둔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특정 시공간에 관한 기억이 밀려든다. 기억에 망각이라는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라, 망각에 기억이라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인다.

‘검은 사각형’ 시리즈는 지금의 이미지 환경에 관한 최초의 진술이었다. 지금의 ‘흉터’ 시리즈는 일종의 숨고르기이다. 작업은 물감을 덮고 긁는 행위를 반복한 것으로, 그것은 망각과 기억을 반복한다. 이전 화면에 다시 물감을 덮어 이전 기억을 망각하고, 표면을 다시 긁어내 이전 화면의 흔적을 발굴하면서 망각을 기억한다. 작업에 상처처럼 남은 촉각적 표피는 작업 과정과 행위를 연상케한다.

레몬 즙을 잉크로 이용해 종이에 글을 쓰면, 불을 쬐어야 글씨가 나타나는 비밀 편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전시는 레몬 잉크로 쓴 사적인 비밀 편지이며, 눈 앞에서 사라진 이미지, 그 망각을 기억하기에 관한 것이다.

 

 

 

 

 

 

 

 
 

 
 

*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vol.20250709-이승찬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