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정 展

 

바람의 자리

The Trace of Breeze

 

 

 

 

2025. 5. 14(수) ▶ 2025. 6. 1(일)

관람시간 | 11 - 17시 (월,화휴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잔다리로 70 | T.010-8782-0122

 

https://www.a-bunker.com

 

 

산, 오름_한지에 수묵채색_80.5x130.5cm_2025

 

 

바람의 자리

 

제주 오름은 고요히 솟아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 곡선은 부드럽고 다정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사각사각 발에 채이는 풀섶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오름에 오르는 길은 길지 않지만, 자연과 함께 호흡했던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게 되고, 탁 트인 풍경보다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제주의 바람이었다. 바다의 숨결을 담은 바람이 땅의 기운과 만나 나에게 고요히 와 닿는다. 바다를 넘고, 논밭과 마을을 지나, 오름 위까지 올라온 바람은, 나무숲을 스쳐 풀섶 위에 앉았다가 나를 흔든다. 그 움직임은 조용하지만 깊고 큰 침묵으로 남는다. 바람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풀들이 숨을 고르며 길을 틔운다. 나는 그 길에 멈춰 서서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더듬어 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그 기운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만끽한다. 풀이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온전히 품어내 듯,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그러한’ 존재로 완성된다. 바람에 누웠던 풀잎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금 전과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 변화는 너무 미세하여 눈에 띄지 않을 정도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고 있는 자연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숲, 오름_한지에 수묵채색_45.5x45.5cm_2024

 

 

3월의 제주는 짙은 초록의 싱그러움 보다는, 은은한 황토 빛의 따스한 반짝임이다. 겨우내 제주의 바람을 강인하게 견뎌낸 억새 줄기와 잡초들이 옅은 색감으로 파도처럼 일렁인다. 그것은 질서 없이 무심하게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쓰이는 것 없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한 붓 한 붓 집중하여 풀잎 하나하나에 깃든 바람을 그려낸다. 바람이 풀을 스치듯 붓이 종이를 스쳐 그 흔적을 드러낸다. 연한 먹점이 차곡차곡 쌓아 올려질 때마다 바람의 거대한 움직임을 기억한다. 풀잎의 고요한 떨림을 기억한다. 나는 자연과 이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먹과 종이와 붓의 힘으로 한 점 한 점 고요히 되새겨본다.

- 이한정 -

 

오름_한지에 수묵채색_60.5x91cm_2024

 

 

오름_한지에 수묵채색_80.5x117cm_2024

 

 

오름_한지에 수묵채색_89.5x145.5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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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50514-이한정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