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스 모던 展

Flex Modern

 

김시보 Kim Si-bo · 모로훈 Moreau Hoon · 문창돈 Moon Chang-dawn

박우정 Park Woo-jung · 박인혁 Park In-hyuk · 백승수 Back Seung-soo

임지윤 Ji-yun · 장광범 Jang Kwang-bum · 채성필 Chae Sung-pil

최현주 Choi Hyun-joo · 홍일화 Hong Il-hwa · 홍현주 Hong Hyun-joo

 

 

 

 

2024. 5. 3(금) ▶ 2024. 7. 3(수)

Opening 2024. 5. 10(금) pm 1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로47길 36 | T.02-2659-2206

 

https://culture.gangseo.seoul.kr

 

 

김시보 作_무제-V_200.0x160.0cm_캔버스에 유화_2023

 

 

김시보

“나는 생물학적으로는 하나의 ‘유전자적 원형’을 지니고 있지만, 문화적, 생태학적, 사회적인 면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 생태계들 속에서 진화한 ‘키메라’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제공받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이 유화 작업을 이끌어 온 작가의 힘이 되어 주었다. 리얼리즘과 인상주의, 전통과 현대성 사이에서 작가의 작품은 공간의 모호함, 색채의 현대적인 해방 또는 디테일 묘사의 고전적인 기량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인간과 자연의 재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김시보의 작업은 사물의 이면, 인간의 운명의 불확실성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짓밟으며 우리가 따라야 할 행동 방침을 강요하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정해진 길에서 일탈한 채, 김시보의 그림은 '실존적 자아'의 표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와 이성의 이름으로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개인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규칙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본질적 진리인 성찰의 한 형태를 통해서 말이다.

 

아멜리 아다모 (역사학자, 미슬 비평가)

 

 

모로훈 作_la Terre et le Cosmos T2_116.0x60.0cm_오크목, 흑단목, 다양한 원목, 금박, 먹_2023

 

 

모로훈

이 수백 개의 나무조각이 서로 붙어 같은 힘으로 움직이며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합니다. 이 덩어리는 바로 질주하는데 너무 곧은 그의 경로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인류입니다. 빛나는 틈은 일출하는 순간의 수평선과 같습니다. 그 빛의 출구는 개인이 더 잘 보고, 이해하도록, 주변을 둘러보고, 행동하는 데 집중하도록 부추깁니다.

작가는 《중력과 지구와 우주》 연작을 통해 '중력의 힘이 사회와 기후 재앙으로부터 지구를 구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우주에 떠 있습니다.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중력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중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것도 중력 때문입니다.

 

'La Terre et le Cosmos' 마리 모호

 

 

문창돈 作_COSMOS-운명적인 것에 대하여_60.0x60.0x20.0cm_철사, 은, 니켈도금_2010

 

 

문창돈

르망의 달이 멀리 떠오르면 불현 듯 떠 오르는 상정과 기호처럼 소박한 서사의 기쁨은 정형이 된다.

거울 앞 탈바꿈의 뉘앙스는 출렁이는 경계선을 기웃거리고 뛰어넘기를 하듯 우리의 먼 외출은 아우성이 가득하고 14구의 파티는 춤을 추게 한다.

멀리 떠나버린 열두 시선들......

과거, 현재, 미래의 표현이 겹쳐진 곳, 굳이 표현하면 Flex modern이 아닐까

 

 

박우정 作_Nature Morte 5D40756_사진, 디아섹, 잉크젯 프린트_120.0x80.0cm_2023

 

 

박우정

정물

삶과 죽음에 관한 하나의 생각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나는 정물 작업에 착수했다.

무생물 보다는 시간의 변화에 반응하는 생물을 소재로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꽃에 흥미를 느꼈다.

꽃들의 다양성, 연약함, 강렬함,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가 정물 작업에 충분한 소재였다.

꽃이 피고 질 때까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마치 자연의 작은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어느 순간부터 마르기 시작하고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꽃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꽃은 죽어가는 건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건가?"

나는 말라져가는 혹은 삶과 죽음의 어느 경계에 있을 듯한 꽃들을 여러가지 상황의 주인공처럼 상상하기 시작했다.

 

불어로 정물은 "Nature Morte"라고 한다, 직역을 하면 "죽은 자연"이다.

"Nature"라는 단어는 어쩌면 삶의 또 다른 형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어가는 우리의 삶처럼…

 

 

박인혁 作_풍경(행위)-1_162.0x130.0cm_캔버스에 유화_2024

 

 

박인혁

작가가 된다는 것,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본다는 것”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근에 파리 근대미술관에서 니콜라스 데슈탈(Nicolas de Staël) 전시를 보고 많은 생각에 빠졌다. 파리를 넘어 뉴욕에 이름난 화랑에 전시를 열고,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걷을 때쯤, 그는 41살의 나이에 남불 앙티브(Antive) 작업실 앞 절벽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으로부터 70,80년 앞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더 처절하게 한 작가가 데슈탈(De Staël)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너머에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그 사이의 불완전한 위치에서 오는 두려움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운동을 좋아했고, 신체를 수련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유학자이면서 서예에 일가견이 있으셨는데, 어린 내 눈에는 그가 쓴 한문 글씨들은 인쇄된 것처럼 완벽해 보였고, 얼마나 수련하면 저 정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 몸을 수련하여 나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요즘 내가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Landscape' 이다. 흔히 풍경이라고 번역되는데, 나는 땅 Land에 포커스를 맞추어 '땅의 풍경' 이라고 칭한다. 인간이 개입된 땅과 인간이 개입되지 않은 땅에 대해 상상해 본다. 두 영역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 구상과 비구상의 표현이 모호해지는 지점이 내가 표현하고 싶은 Landscape 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붓을 사용하기보다는 신체의 수련에 가까운 손짓과 몸짓의 원초적인 표현은 화면에서 자유분방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표현하는 이의 움직임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백승수 作_land scape_162.0x130.0cm_캔버스, 먹_2024

 

 

백승수

그림을 시작한 이후 나의 관심은 인간이었다. 지금 또한 변함이 없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의 시선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작품들은 형태를 잃어가고, 인간의 자아, 내면세계로 나의 주의가 끌리고 있다.

사람은 사회와 인간의 관계 연속성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거대한 물질문명과 결합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색을 잃어버리고 획일화된 기계 부속품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개개인의 자아는 소멸하여가고 사회라는 하나의 단위 속 구성 물질로 단정 지어진 개인이 존재하는 형상을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 속에서 인간은 자아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이 자아 상실의 경험은 인간의 존재가치 증명의 욕구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타인과 다른 자신의 특별함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작업을 통하여 인간 내면의 활동을 외부로 끌어내어 내면의 혼란을 극복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임지윤 作_고슬고슬_91.0x72.2cm_한지에 먹, 자연안료, 채색, 연필_2023

 

 

임지윤

생명은 종속적으로 발현되고 지속적인 변형과 재조합을 통해 유기적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진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이브리드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형상화 하면서 한 공간 속에 함께 숨쉬는 작가의 영역을 만들어 간다.

 

 

장광범 作_Montagne B_162.0x292.5cm_캔버스에 아크릴, 샌딩_2023

 

 

장광범

장광범의 작업에서 공명을 떠올리는 것은 고요한 호수에 돌을 하나 던져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는 물결들을 만들었던 어린시절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잔잔한 물가에 하나의 돌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래를 흩뿌리면 더 미세하지만 수없이 많은 동그라미들이 만들어졌다 이내 사라지기도 했다. 이것은 소리를 만드는 공기의 진동과 같은 속성이다. 소리는 수많은 진동을 만들며 공기를 울려 소리를 전달하지만 이내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장광범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직관적으로 과거의 여러 경험들이 소환되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와 달콤한 마들렌 냄새를 맡으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소환하며 잃어버린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들뢰즈는 공명 효과를 설명하는 데 프루스트의 마들렌 에피소드를 멋지게 인용했다. 과거의 마들렌으로 경험했던 행복감이 우연히 현재의 마들렌 경험과 병치됨으로 생기는 행복감이 바로 공명의 효과이다.

 

이수영(백남준아트센터 학예사), 「장광범이 만드는 “공명”」 중

 

 

최현주 作_잃어버린 도시를 찾아서 24-Ⅰ_160.0x240.0cm_혼합매체_2024

 

 

최현주

은색 철망 격자로 구성된 최현주 작가의 설치작품은 새로운 원근법을 열어낸다. 빛은 모빌의 섬세한 운동감을 자아낸다.

뚫려 있는 재료이기에 가능한 큐브와 직사각형으로 정교하게 겹쳐진 두께 속에서 관객의 시선은 만화경처럼 분리 가능한 또 다른 공간의 기하학을 발견할 수 있다.

철망으로 만든 큐브의 축적, 큐브 속의 큐브로 구성된 설치물의 가벼움 속에서 인지능력의 기준이 소실된다.

종이 평면 작업 속에는 네모진 아이콘 속으로 소멸되는 큐브를 통해 기억에 관한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마치 꿀벌 떼가 날면서 사라지는 것 과도 같다.

설치작품은 같은 주제를 건축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한다. 작가는 유령같고 변형 가능하며 침투성있는 기억의 건축물을 제시한다.

부슬비가 풍경을 걸러내듯이 가려진 이미지의 기억은 결국 기억이라는 채로 걸려진 과거와 닮아 있다.

 

이레아나 코르네아 평론 중에서

 

 

채성필 作_대지의 몽상(230721)_162.0x130.0cm_캔버스에 천연안료_2023

 

 

채성필

“흙으로 그리는 흙의 공간”

본인에게 있어, 흙은 모델이자 작업의 원천이다. 나는 ‘흙’이라는 재료로 ‘흙의 공간’을 그린다.

본인의 작업은 자연, 혹은 고국에 대한 회귀적 감상을 지닌 여행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여행 중 채집한 ‘흙’은 감상적 모티브를 포함한 마티에르로 사용되고, 이 ‘흙’이라는 마티에르는 ‘흙의 공간-이미지, 주제’을 표현하는 직접적 도구가 된다. 곧, 본인의 회화공간은 주제와 재료, 그리고 이미지가 모두 ‘흙’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 단어로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홍일화 作_볕뉘 0301.0302.0303_545.4x227.3cm_캔버스에 유화_2024

 

 

홍일화

나뭇잎에 빛이 스며든다. 이슬을 머금은 잎들이 투명하게 반짝인다. 어떤 빛은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며 또 다른 생명의 머리를 비춘다. 어느 새 숲은 빛의 조각들로, 생의 물결로 아른거린다.

볕뉘는 볕의 그림자를 일컬음과 동시에 햇볕을 은혜와 덕으로 여기며 고맙게 이르는 우리말로, 또 다시 세 개의 의미로 파생된다. 그 첫 번째는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이며, 두 번째는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그리고 세 번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이다.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을 신뢰한다. 아직 돋아나지 못한 만물은 움트고 성장하며 생동하는 존재로의 희망을 품는다. 이 가능성에 ‘빛’을 더하여 숲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홍현주 作_무제_97.0x130.0cm_캔버스에 유화_2024

 

 

홍현주

순간의 감정들을 모아 몇개의 형태로 만들어 이리저리 굴려본다. 삶의 색채도 넣어보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채워가면 어느 순간 너무 많은 이야기가 되어 복잡해진다. 다시 지워보며, 슬픔은 아름다운 파란색으로, 즐거움은 따뜻한 색으로, 삶이 주는 모든색을 주워 담아보니 나중엔 하나의 그림이 되어진다.

이렇게 나의 화폭은 그날의 일기가 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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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0503-플렉스 모던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