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희 展

 

Color Phantasmagoria <행복한 정원>

 

 

 

갤러리빛

 

2024. 2. 20(화) ▶ 2024. 3. 9(토)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45길 11 | T.02-720-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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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파편들

 

민승기 | 경희대 후마니타스대학 객원교수/비평이론

 

파편들(fragments)은 그 자체로 온전한 ‘전체’이다. 그러나 파편들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전체로서의 부분, 부분으로서의 전체. 파편들은 부분/전체의 대립으로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불러낸다. 먼저 전체로서의 부분. 단순히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분이 아니기에 파편들은 전체를 이루지 못한 죄의식으로 고통 받지 않는다. 잃어버린 전체에 대한 향수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편들은 ‘최초의 온전함--타락으로 인한 상실--잃어버린 온전함의 회복’이라는 서구 형이상학을 넘어선다. 부분으로서의 전체. 파편들은 전체보다 못한 부분,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 결핍이 아니라 전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부분, 전체보다 더 큰 부분이다. 전체로 소진될 수 없는 부분, 즉 ‘나머지’로 존재하는 파편들은 의미가 지울 수 없는 얼룩들이다. 온전함 속에서 온전함의 불가능성을 외치는 파편들은 유한성의 형식 속에서 무한성을 소집하는 꿈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말대로 ‘꿈이 파편’일 수 있다면, 꿈의 파편들이 단순히 꿈을 이루는 ‘부분’을 넘어 꿈 자체를 파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파편들은 꿈이 하나의 온전한 의미체가 될 수 없도록 한다. 파편들이야 말로 의미가 설명하거나 산정할 수 없는 나머지, 의미를 불가능하게 하는 잉여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결코 온전히 해석될 수 없는 빈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곳이 바로 꿈을 가능하게 하는 기원이자 중심, ‘꿈의 배꼽’이라 말한다. 꿈은 자신의 한 가운데에 자신의 불가능성을 품고 있는 파편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슐레겔(Friedrich Schlegel)처럼 꿈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꿈의 불가능성이 꿈속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은 꿈 ‘이상’으로 존재한다. 파편이 전체이자 (전체를 능가하는) 부분이듯 『꿈의 해석』은 해석불가능한 것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꿈은 ‘재현불가능한 것의 재현’(노발리스), 재현과 재현의 불가능성이 동시에 구현되는 파편이다. 프로이트의 꿈을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파편’으로 읽어내는 샌포드(Stella Sanford)는 꿈을 ‘무한성을 품고 있는 유한’ ‘의미와 의미의 불가능성을 동시에 말하는 파편’으로 정의한다. 꿈이라 불리는 파편들.

<컬러 판타스마고리아> 연작은 늘 자기 ‘이상’을 말하는, 자기 ‘이상’으로 존재하는 파편들의 세계이다. 파편들은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그들은 의미의 결핍이라기 보다는 의미의 ‘잉여,’ 의미화할 수 없는 나머지, 얼룩을 지시한다. 그러나 완결이 고립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반하는 방식으로, 자신과도 ‘다른,’ 자기 ‘이상’의 것으로 존재함으로써 ‘서로’가 된다. ‘자기’이자 ‘타자’인 키메라적 대상들. 그러나 파편들의 공동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가진 하나의 완결체를 형성하지 않는다. 최종적 의미나 목적으로부터 면제된 파편들은 ‘유희’한다. ‘자기위반’이라는 미끄러짐을 통해 유희는 제도나 체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온전치 못함을 드러낸다. 미끄러짐은 초월적 의미를 통해 교정되기 보다는 또 다른 파편들의 미끄러짐만을 초래할 뿐이다. 의미의 부름 속에서 의미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출몰하는 공간이 파편들의 세계이다. ‘소망 충족으로서의 꿈’ 한가운데에서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파편인 외상(trauma)이 발생한다. 의미의 미끄러짐을 초래하는 파편들의 ‘현기증 나는 쾌락’(니체), 꿈의 파편들. <컬러 판타스마고리아> 연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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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0220-변재희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