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YOORI 展

 

없는 날 Non-existent Day

 

 

 

페이지룸8

 

2024. 2. 17(토) ▶ 2024. 3. 7(목)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11길 73-10 1층 | T.02-732-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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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known_캔버스에 유채_33.4x19cm (4M)_2024 *1번 작품 위에 설치

 

 

없는 날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다. 나는 글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글에 내 모든 것들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로 설명되는 과정에서 나의 진심과 생각이 언어의 형태로 갇히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그 형태에 대한 의문과 불신을 늘 가진다. 하지만 무언가를 전할 때, 언어로써 발화되고 전달되는 방식의 필수불가결함을 인정한다. 나의 미술로 언어의 틈새를 들여다보면서도 그 결과물들을 전할 때 필수적으로 언어화 과정을 거쳐야 함에 늘 아이러니를 느끼지만, 그 괴리감을 이리저리 요리해 보며 그림과 언어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에게 가장 적절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도를 찾아보려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의 작업들이 온전히 닿을 수 없는 구석구석들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글이라는 것을 써 본다. 하지만 결코 이 글은 그림의 모든 것을 말해주진 못할 것이다.

1.
해와 달이 계속해서 뜨고 진다. 한 번의 해와 한 번의 달을 마주하는 시간, 우리는 그 시간을 하루라고 부른다. 그 하루의 시간은 날짜라는 숫자의 이름을 갖는다. 365개의 숫자들은 1년이 되고, 무수한 1년들은 쌓이고 쌓여 또 하루가 되어 돌아온다.

매일을 잃는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그만큼의 시간을 매일 잃는다. 잃어버린 어제들은 쌓이고 모여 나의 모양으로 축적된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은, 나라는 모양으로 돌아온다. 매일을 잃지만, 매일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어제들이 쌓여 나의 내일이 될 것이다.

매일을 잃다 보면 지겹게도 매년 생일이라는 것이 돌아온다. 숫자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무한의 날들 중 내가 태어난 날과 같은 숫자 이름을 가진 날이 돌아올 때마다, 나의 탄생을 축하받는다. 그저 수만 번의 하루들이 지나 또 다른 하루가 되는 것일 뿐인데, 몇만일 전의 태어남을 기념하고 축하받는다.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몇만일이 지난 ‘생일’이라는 날은, 정말 내 생일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그저 무수한 앞으로의 날들 중 지나가는 하루 일뿐인 것이아닌가.

그럼에도 우습게도 매년 생일을 기다린다. 뭐 그리 대단한 날이라고, 개인전의 일정을 덜컥 생일이 있는 2월로 잡아버렸다. 매년 기대하면서도 매해 별 볼일 없이 지나가는 날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생일에 특별함을 부여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어지고 말았다. 대체 왜?

그저 1년 중 하루 일뿐인 날에 왜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내 안을 들여다보다, 숫자의 이름을 갖는 날들에 대하여, 내뱉는 숨과 함께 1분 1초 사라져가는 생에 대하여, 생과 사 그리고 탄생과 소멸 사이를 떠도는 존재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The Unknown_캔버스에 유채_33.4x19cm (4M)_2024 *1번 작품 위에 설치

 

 

2.
잠들기 전 감은 눈으로 허공을 본다. 지독한 어두움과 그 사이에 부유하는 막연한 공포가 코앞에 다가온다. 어떤 모양새인지는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그 막연함에 몸을 맡기고 짓눌려본다. 아마도 죽음에 가까운 기분일까 하고 상상을 하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너무나도 큰 무서움은 나를 극한으로 몰고 가다가도, 어느 순간 모호한 죽음의 형태를 조금이나마 또렷하게 느끼는 순간이 오고, 그와 동시에 내가 살아있음을 / 내가 살아있기에 이런 두려움을 느낌을 지각한다. 아주 낯설고 생경한 생의 감각을 느낀다. 일상적이지 않은 감각이 깨어나고, 깨어나는 감각으로부터 생의 기운을 얻는다. 그 지각은 어떤 형태의 또 다른 위안을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생의 감각을 느낀다.

살아있음을 지각하고 죽음에 공포를 느끼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무이하지 않은가? 너무나도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매일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며 생의 마지막을 걱정하는 불쌍한 존재들. 삶과 죽음 사이를 유영하며 떠도는 티끌 같은 존재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들에게 꽤나 외면당하기 일쑤다. 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도 늘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죽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음은 무서운 것, 두려운 것, 미지의 것으로 터부시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징한 진리이지 않은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결국 사라진다.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진리임에도, 나는 이 명쾌함을 명쾌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사실, 내 숨이 닿는 모든 곳곳에 죽음이 깔려있지 않은가. 눈앞의 초콜릿 포장지, 저기 가엾게 놓여있는 화분, 멀리 걸어가는 어떤 이들, 밤마다 우는 고양이, 그리고 내 바로 밑 의자까지. 곳곳에 놓인, 가볍게 스며 든 죽음을 느낀다. 언젠가 소멸할, 기필코 사라질 운명의 것들을 떠올린다. 이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이 예정된 소멸을 작은 죽음이라 생각해 보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그 작은 죽음을 지닌 것들은 순간 내가 되고, 나는 그 사이에 스민 죽음이 되어 동일시된다. 내 앞의 모든 것이 사라짐을 떠올리며 너무나 커다랗게만 느껴지던 죽음을 조금 더 당돌하게 바라본다. 매일의 모든 것의 죽음을 떠올려보며 단순한 사라짐의 진리를 조금 더 가벼이 들여다본다.

 

 

The Unknown_캔버스에 유채_33.4x19cm (4M)_2024 *1번 작품 위에 설치

 

 

3.
내가 보는 모든 것은 생과 사 사이의 부유물들이다. 그 무수한 부유물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온전히 설명될 수 있을까? 모든 존재, 그리고 심지어 모든 날들은 글자로써, 숫자로써 모두 이름 지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름들은 그들을 온전히 말해주지 못한다. 모든 것을 담기에 언어는 너무 작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존재들이 너무나 크고 다양하고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어떤 경계와 경계 사이의 것들, 이름 지어지지 못하는 것들, 말로 담지 못하는 것들에게 적절한 자리와 이름을 주는 것 말고 - 그 애매한 자리 그대로의, 그 설명 안되는 모양 그대로의, 이름 없는 그대로의 상태를 바라봐 주고 싶다.

나는 세상에 이미 지어진 경계들을 지워보고 정의 내리는 것을 보류하는 태도를 지향한다. 이 알 수 없고, 너무나도 무섭다가도 소중해지는 이 삶을, 그리고 그 삶을 함께하는 존재들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다양하고 복잡하게 감각하고 표현하고 싶다. ‘생일’이라는 어쩌면 아주 하찮고 사소한 날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골칫거리를 떠올리고, 그 거대한 고민덩어리 안에서 마주하는 작은 것들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가 설령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애매모호한 채로,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보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도 이 두려운 삶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어떠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을 떠올리고, 그 안에서의 또다시 작은 것들을 찾아가며 설령 언어로 포착되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그림으로, 나만의 언어로 어떤 것들을 매만져주고 싶다.

 

2024. 2

 

 

The Unknown_캔버스에 유채_33.4x19cm (4M)_2024 *1번 작품 위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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