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선 展

 

마음이 내려앉은 장소

 

알라스카의 양이 사는 방식_53x45cm_한지,닥원료,채색_2022

 

 

Gallery 9

 

2023. 3. 3(금) ▶ 2023. 4. 7(금)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00, 2층 | T.010-9459-8600

 

 

休_45x61cm_한지,닥원료,채색_2022

 

 

구민선 - 마음이 내려 앉은 장소

 

중국에서 초기 종이는 각종 섬유를 돌절구에 찧어서 만들어졌는데 채륜에 의한 이 채륜지는 한대에 이르러 원료를 발효시킨 후 섬유를 뽑아 내어 만든 종이인 화선지의 효시를 거쳐 이후 필사용의 종이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한다. 흔히 종이란 ‘식물성 섬유를 재료로 만든 얇은 것’이라고 정의되는 데 이 섬유 물질의 얇은 층이 동양회화에서는 본질적인 회화의 표면이자 서예의 장이 되어왔다. 그리기와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그것들이 보이는, 펼쳐지는 궁극적인 피부/공간은 ‘저피(楮皮)’ 즉 닥나무 껍질이다. 종이라는 말의 어원은 저피로 부터 파생되었다.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종이는 이후 한국 특유의 한지, 장지 등으로 발전되어오면서 한국인의 감수성과 미의식으로 매만져지고 더없이 따스하고 포근하며 은은한 피부, 부드러운 감촉을 깊숙이 발효, 저장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한지가 한국현대미술 작가들에게 근원적인 미술 재료로 구사되거나 다루어진 역사 또한 꽤나 유장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생각이다.

 

 

남과 여_50x65cm_한지,닥원료,채색_2022

 

 

구민선은 소색의 닥지를 주재료로 해서 그림을 그린다. 이 작가가 한지 자체를 그림의 적극적인 매체로 구사한 이력은 무척이나 오래되었다. 견고한 물성을 지닌 종이는 이미 특정 색채와 질감, 표정을 제 피부 스스로 견지하면서 자립한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 이상의 존재로 버티고 있다. 두툼한 한지는 일종의 레디메이드로서의 성격을 유지한 체 표면이자 형상을 구현하는 한편 그것 자체의 색채와 물질감을 드러내면서 이미 회화적인 요소로서 충분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들을 잘게 자르고 붙여 가면서, 일종의 콜라주로 인해 특정 이미지를 성형해나가고 채색을 입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각/회화의 여러 양상들이 복합적으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펼쳐진다. 여기서 모든 재료는 그것이 지닌 조건들에 순응하면서 전개된다.

애초에 동양의 종이는 인간의 의지와는 별도로 자율성에 따라 수축되기도 하고 휘청거리기도 하는 자체의 물성, 이른바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생명체라고 여겨져 왔다. 물론 붓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재료와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것으로 수렴될 수가 없다. 여기에 인위와 자연, 우연성과 예측할 수 없는 여러 변수가 개입하고 작동한다. 작가는 그런 변수를 끌어안으면서, 순응하면서 작업에 임한다.

 

 

저 밑바닥엔 무엇이 있을까_34.5x73cm_한지,닥원료,채색_2020

 

 

구민선의 작업은 닥지를 화면에 콜라주 하듯 입히고/부착하고, 부조식으로 형상을 올리고 난후 동양화물감으로 채색을 입혀 완성하는 작업이다. 상당 부분은 한지, 닥지 그 자체의 색감과 질감이 고스란히 그림 자체가 되어 자리하고 있다. 칠해진 부분과 남겨진 부분이 서로 길항하면서 혹은 공존하면서 그림은 완성된다. 아니 그림은 그렇게 상호보조적이다. 따라서 그림은 한지, 닥지 자체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집이나 나무 등의 이미지를 안겨주기도 한다. 재료와 이미지가 대등한 차원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한편 이 작업은 입체적이면서도 원근이 부재한 평면인 성격이 공존하고 조각이자 회화이며 한지/닥지 자체의 색채와 부분적으로 개입한, 색채의 협업에 의한 작업이다.

종이로 만든 화면에 우선적으로 부감 되는 이미지는 일련의 풍경이다. 자신의 작업실 부근에서 쉽게 접하는 먹빛 기와 지붕과 마른 나뭇가지들, 성균관 앞마당에 자리한 거대한 은행나무와 하단에 자리한 인물, 또는 두 그루의 나무만이 헐벗고 서 있거나 광막한 들판에 드문드문 도열한 나무들, 수직으로 솟은 여러 개의 돌탑들, 그리고 바위 산을 오르는 산양, 산 정상에 자리한 작은 암자 등을 그린 풍경화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취한 소재이고 본인이 여행을 가거나 산책길에서 마주한 장면에서 차용한 것들로 보인다. 외국 여행지에서 취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한국적인 멋과 미감이 감도는 소재가 건져 올려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실재적인 소재를 지극히 간략하게 단순화시킨 후에 이를 한지로 성형한 후 몇 가지 제한된 색으로 마감했다. 이는 콜라주 작업에 의한 불가피한 측면이다. 그린 것이라기 보다는 종이로 성형한 작품이기에 도상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다.

 

 

The roofs_73x53cm_한지,닥원료,채색_2022

 

 

도톰하게 요철로 올라온 입체적인 화면은 상당히 촉각적인 감각을 부여한다. 그 효과들이 기와 골의 선과 나뭇가지와 탑, 건물의 외관, 바위와 탑, 동물과 여타 형상들의 존재감을 실감 나게 가시화한다. 시선만이 아니라 촉각을 자극하며 다가오는 그 선은 개별 형상들의 여러 질감/존재감을 부여하고 있다. 아울러 먹색과 색채의 강도의 차이가 은연중 평면적인 구성 안에서 공간감을 조성하고 있기도 하다. 붓으로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손으로 빚어 붙인 그림/조각적인 이 물질적 회화 작업은 따라서 부득불 일정한 틀 안에서 정형화된 선을 따르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흔들고 순화시키면서 좀더 자연스러운 선의 맛과 자연의 유기적이고 생성적이며 활기찬 맛 또한 부분적으로 흡입해낸다. 특히 화면 하단에 먹빛 기와 지붕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두 그루의 나무가 농담을 달리하면서 거리감의 차이를 조성하며 서 있고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으며 그 주위로 싱그러운 초록의 점들이 조밀하게 찍힌 그림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는 상당히 생동감 넘치는 흥미로운 사례로 주목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_71x81cm_한지,닥원료,채색_2014

 

 

작가의 근작은 대부분 적조하고 서정성이 농밀하게 깔린 그림들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결국 자신의 마음의 결, 거름망으로 걸러진 것으로만 남는다. 혹은 자신의 시선에 의해 판독되고 해석된 것에 의해 눌려진 것들이 이미지/상으로 찍힌다. 구민선의 일련의 풍경 역시 그러한 것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그린 세계/풍경이란 결국 자기 마음이 보고 싶은 것, 마음과 정신이 보고 해석한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 다소 쓸쓸하고 허망한 것들이자 동시에 다시금 평온하고 마음의 휴식기를 찾아가는 여정이 깃든 그림이기도 하다는 인상이다. 자신의 마음이 내려 앉은 장소와 기물들이 차분하게 화면에 걸려 들었다. 헐벗은 고목들과 금빛으로 물들어 눈이 부신 은행잎들과 반듯하고 정갈하게 줄을 맞춰 누운, 고운 조선 먹빛 기와들, 그 사이 생기 넘친 신록의 잎사귀들이 곱고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오르는 기원의 돌탑과 가파른 돌산을 오르는 산양의 외로움과 그 모든 생명체들의 삶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장면이 또한 시리게 아름답다. 여기에는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반추의 시선이나 앞으로의 삶에 대한 모종의 희구가 동시에 뒤섞여 빛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추억 여행_122x30.5cm_한지,닥원료,채색_2016

 

 

바람_83x63cm_한지,닥원료,채색_2017

 

 

 

 

 
 

구민선 | Gu, MInseon

 

성균관 대학교 미술교육과 | 홍익 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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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minseongu@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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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30303-구민선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