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품격 展

The Dignity of Art

 

박효진, 배상순

 

 

 

갤러리 이배

GALLERY LEE&BAE

 

2022. 9. 1(목) ▶ 2022. 10. 23(일)

부산광역시 수영구 좌수영로 127 | T.051-756-2111

 

www.galleryleebae.com

 

 

배상순 作_Waves ii_130x130cm_Gesso on velvet_2019

 

 

밀고 밀리면서 쌓이는 시간의 층_배상순의 벨벳 회화

 

이선영 | 미술평론가

 

배상순의 작품은 겉으로는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렇지만 휘저으면 감춰진 것들이 떠오를 듯한 잠재성으로 가득하다. 시간의 축만이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검은 벨벳에 하얀 젯소로 그려지는 형상은 애초에 명확할 수가 없다. 수없는 필획을 거쳐야 겨우 명암 정도가 구별된다. 작가는 이러한 불투명성을 삶과 예술 모두에 적용한다. 거기에는 시간의 저항을 이기고 드러내려는 의지, 반대로 모든 행위를 무위와 죽음으로 덮어버릴 수 있는 어둠의 길항작용이 있다. 밝음과 어둠의 상호관계는 기억과 망각의 상호관계와 연결된다. 작품의 독특한 면은 검은 벨벳이라는 바탕과 관련된다. 작가는 이 재료에 대해 “검은 캔버스 벨벳은 나의 회화에 관한 모든 감각을 엎어 주는 매체”라고 말한다. 벨벳 위에 청먹과 젯소를 바르고 먹선과 목탄으로 선을 그리거나 젯소를 희석한 물감으로 세필한 화면은 수많은 반복에 의한 명암이 명멸하는 장이다. 원래 이 선은 인체 데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작가는 몸을 재현하는 대신에 몸의 리듬을 표현한다. 구조가 아니라 작동을 나타낸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가장 검은 검정은 검은 벨벳이라고 하면서, 이보다 더 깊은 검정은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에 있다고 말한다. 배상순이 캔버스나 종이 대신에 선택한 주요 매체인 벨벳은 묶인 매듭을 풀거나 잘라내는 극적 행위처럼 빛과의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배경을 이룬다. 작가의 붓질은 이 절대적인 검정에서 기억과 의미를 길어내려는 무수한 해석의 몸짓이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운명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소리 없는 매체인 회화는 침묵으로 말한다.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한 작품은 살아있는 존재뿐 아니라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도 깔고 있다. 자연과 역사가 그렇듯이 작품 또한 거듭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오래된 텍스트다. 전시 제목으로도 쓰인 바 있고 작품 자체가 ‘시간의 층’이기도 한 작품은 농밀한 밀도를 가지는 추상적 언어를 구사하지만, 작품에 역사와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작가는 벨벳처럼 중성적이지 않은 표면 위에 무수한 선을 그으면서 서사의 과정에 상응하는 행위의 흔적을 남긴다. 지상적 존재가 유한한 삶을 살며 오갔던 발자국 같은 무명의 흔적이다. 흔적은 길 위에도 길 밖에도 있다. 드로잉 기반의 작품은 드로잉이 쓰기의 연장임을 알려준다. 쓰인 것 위에 또 쓰이기를 반복한 사연은 명쾌하게 읽을 수 없다. 멀리서 본 화면에 파손된 기호 같은 형상이 떠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몸에서 출발한 지글거리는 복잡한 선적 운동은 고요한 초월과는 거리가 있다. 화면을 확대해도 흐트러지지 않는 작품의 밀도는 각자 유일한 삶을 영위하는 듯하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격세 유전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있다. 멀리서 보면 인간의 역사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의미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어두운 바탕에 수없이 그어진 선은 어떤 명확한 형태, 즉 의미로 귀결되기보다는 생성과 소멸의 흔적 그 자체로 남아 있다.

 

 

박효진 作_Venus floridity_95x110cm_pigment print on paper_2020_ed.5

 

 

욕망이라는 이름의 괴물

 

전혜정 │ 미술평론가

 

메두사(Medusa)는 전에는 아름다운 처녀로, 특히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감히 아테나와 그 미(美)를 다투려 했기 때문에 여신은 그녀의 미를 박탈하고 아름다운 머리칼을 ‘슈웃! 슈웃!’ 소리 내는 여러 마리의 뱀 모양으로 변하게 하였다. 메두사는 무서운 모습을 한 잔인한 괴물로 변했다. 또한 그녀를 한 번 본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동굴의 주위에는 그녀를 보았기 때문에 돌로 변한 많은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아름답던 메두사가 끔찍한 괴물이 된 것은 그녀의 욕망 때문이다. 메두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자신이 여신보다도 더 아름답기를 원했으며, 아테나의 신전에서 포세이돈과 정을 나누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등 그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그 욕망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의 욕망은 꿈틀거리는 뱀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메두사처럼 점점 괴물처럼 우리 속에서 자라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괴물로 변하기 전의 메두사처럼 욕망의 모습을 숨긴 채 스스로를 제어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욕망은 언제든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저주에 걸린 메두사처럼 아름다운 과거만을 간직한 끔찍하고도 슬픈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박효진의 작품들은 그런 슬픔 괴물을 닮았다.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니케, 다비드, 포세이돈, 성모상 등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거나 인간의 이상향을 대변하고 있는 신화 속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이며, 청화백자는 가장 고도의 문화적 완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이거나 고도의 문화적 산물은 인간이 꿈꾸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바닥을 딛고 있는 현실적 이상화의 모습과 달리, 위의 화려한 꽃들은 더 높은 욕망의 산물이며, 닿을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절과 시간에 상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 미친듯한 꽃의 향연에 색색의 물감들이 끼얹어져 있다. 숨을 돌릴 수도 없이 강렬함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이 꽃다발들은 그러나 가장 화려한 상태에서 멈추어져 있는 조화이며, 거세된 욕망에 다름 아니다.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조각상과 청화백자가 진정성이 있는 진품이 아닌 작가가 시장에서 구입한 복제된 가품이듯이 우리가 꿈꾸는 현실은 그것만으로도 진짜가 아닐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욕망의 산물과 이상화는 가장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거세되고 죽어있으며, 그 터져 나오는 색채는 피를 흘리듯, 눈물을 흘리듯 아래로 향하고 있다.

 

 

배상순 作_Untitled_Panorama-2s_190x130cm_Gesso on velvet_2019

 

 

현실을 이상화한 모습은 가장 행복한 모습이어야 한다. 닿을 수 없을지라도 파라다이스의 모습은 가장 완벽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효진의 작품 속에서 현실 속의 이상화와 궁극의 이상향의 모습은 왠지 모를 슬픔을 담고 있다. 이 작품들은 한 때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두렵기까지 한 괴물들의 모습을 닮아있다. 메두사는 아름다웠던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저주 속에 영원히 가두어버린 채 자신의 현재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돌이 되어 버린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이면서 외눈박이 괴물로 탄생한 키클로프스(Kyklops)는 인간을 내던져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을 정도로 잔혹하지만 바다의 요정 갈라테이아(Galatea)의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워한다. 세이렌(Seiren)은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배의 선원들을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선원들이 노래를 들었음에도 그 지역을 빠져나가면 자존심에 결국 죽음을 택해야 하는 운명이다. 매혹적이지만 위험하고, 아름답지만 슬프며, 결국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죽음으로까지 갈 수 밖에 없는 서글픈 괴물들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들의 조합 속에서도 결국은 고개 숙여 제 자신의 슬픈 액체를 떨구어야 하는 박효진의 작품들에게서 되살아난다.

박효진의 작품 속에 투영된 욕망은 잃어버린 욕망, 거세된 욕망에 대한 분출과 슬픔을 동시에 드러낸다. 극도의 아름다움과 최상의 선을 지녔으나, 결국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게 된 서글픈 괴물의 모습이 박효진의 작품에 투영되어 있다. 조용한 청화백자의 단아함과 극도의 아름다움과 최상의 선을 추구한 조각상들 위로 잘려져 꽂혀 있는 화려한 꽃들은 그 아름다움을 잃지도 시들지도 않지만, 그 꽃은 향기도 없이 박제된 이상향을 보여준다. 그 이상향은 잃어버린 낙원이자, 강박적 젊음에의 목마름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욕망이 채워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패한 이상향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는다. 뜨거운 피보다 붉고, 황금보다도 밝고, 꽃들보다도 화려한 색은 거세된 욕망의 꽃다발 위로 처연히 흘러내린다. 비로소 완벽한 현실의 조각상과 이룰 수 없는 이상향이 흘러내리는 물감으로 만나게 된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합쳐진 우리의 욕망과 이상향의 조합물들은 아름답지만 그로테스크한 괴물이 되었다.

박효진의 욕망이 구현되는 공간은 ‘밤의 공간’이다. 이곳은 감추어두었던 성적인 비밀이 드러나고, 욕망이 꿈틀대며, 신비한 힘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밤의 공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밤은 내 앞의 대상이 아니고, 나를 에워싸며 나의 모든 감각을 관통하고 나의 상기를 질식시키며, 나의 인격 동일성을 거의 파괴한다. 나는 더 이상,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 대상들의 윤곽을 보는 것으로부터 나의 조망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밤은 측면이 없고 그 자체로 나와 접하며, 밤의 통일성은 마나(mana: 초자연적인 힘)의 신비적 통일성이다....모든 공간은 반성하는 자에 대하여 그 부분들을 결합하는 사고에 의해서 지탱되나, 그 사고는 아무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그것과 결합하게 되는 것은 밤 공간의 한가운데서이다.” 밤에 공간에서 펼쳐지는 박효진의 작품은 그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뿌리도 없는 욕망의 정원을 꾸민다. 밤의 정원 속에 잘린 메두사의 머리가 굴러다니듯 박효진의 욕망 오브제들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돌이 된 메두사의 머리와는 달리 박효진의 욕망들은 아직도 그 색을 반짝이며 채워지지 않는 그 안의 독기를 내뿜고 있다. 메두사의 머리가 돌이 된 것은 거울 속에 자신의 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효진의 작품을 우리의 거울인 듯 바라본다. 거기에서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괴물 같은 내 자신의 욕망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감각을 관통하고 나의 비밀을 드러내며 나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어두운 밤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자신 안의 괴물적 욕망을 확인한다. 우리는 모두 괴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돌이 되지 않고 완전히 거세되지도 않은 채 아직도 채우지 못한 갈증을 뚝뚝 떨구어내며 서 있다. 끝없는 욕망의 밤 속에 서있는 괴물 같은 자신의 모습. 이것이 박효진이 꾸민 정원의 모습이다. 밤의 정원에서 욕망은 끊임없이 꽃을 피운다.
꼬 자라난다. 계속 꽃을 피운다.

 

 

박효진 作_Wisdom_94x110cm_pigment print on paper_2020_e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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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20901-예술의 품격(The Dignity of Art)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