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귀희 展

 

그림은... 나의 詩

 

哀想_89x58cm_화선지에 수묵채색_2011

 

 

갤러리 라메르 제1전시실

 

2011. 11. 16(수) ▶ 2011. 11. 22(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 02-730-5454

 

www.galleryLAMER.com

 

 

53x72cm_장지에 수묵채색_2011

 

 

낯익은 주변의 산하를 그윽하고 포근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한국화가 홍귀희의 개인전이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다. 작가는 회화가 지니고 있는 시적 요소와 동양화 색감이 주는 특유의 ‘禪’적 감응을 결합해 인간 내면의 본질을 소박한 자연 풍경 속에 투영해 보고자 하였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공기, 대자연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기운, 주체와 자연 객체 간에 경험적으로 교감되고 있는 영감의 요체들을 담고자 하는 충동이 바로 화면의 필치에 잘 나타나 있다. 전통적 미의식과 형식, 기법을 고수한 실경 산수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질서의 본질을 고요하게 대면 하고자 했던 작가의 바람을 발견할 수 있다.

 

 

흘러가네_142.5x73cm_장지에 수묵채색_2011

 

 

자연의 속살을 열어 보이는 새털 같은 몸짓들

글 ㅣ이재언 (미술평론가)

 

한국화 작가를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자문하는 물음이 하나 있다. “과연 오늘날 한국화란 무엇인가?” 한국화가 ‘현대’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항상 이 문제에 직면하는 것은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한국화가 처한 상황을 기술하는 담론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 있다. ‘해체’, ‘정체성 위기’, ‘공동체 미의식’, ‘근간으로서의 재료’ …… 오늘의 한국화 상황을 진단할 때 거의 반복적으로, 혹은 상투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념들인 줄 알면서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화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두통이 나도록 따져본들 이제 더 이상 교조적인 원론적 개념은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해졌다.

오히려 극단적인 비약 혹은 혹독한 부정과 회의(懷疑 )가 더 설득을 얻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한국화라는 개념과 용어를 폐기하는 것으로 가정해 보면 의외로 사고가 명쾌해지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한국화가 죽어야 산다는 역설도 공공연히 회자된다. 정말이지 담론의 교착 상태를 풀어갈 수 있는 해답과 깨달음이 바로 여기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없지 않다. 기존의 문인화를 포함한 한국화 전체를 아무런 전제 없이 보편적 회화의 범주에서 가혹하게 매몰시키고 통합해버리면 어떤 결과가 올까. 그러면 정말이지 한국화는 없어지고 보편적인 회화만 남는 것인가. 그런데 참으로 묘하다. 이러한 철저한 정체성 부정과 회의 바로 그 다음, 오히려 한국화의 정체성이 역설적으로 건강하게 소생될 수 있음을 아는가.

 결국 ‘현대’라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한국화가 드러내고 있는 해체적인 양상을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먹의 신비로운 조형적 장점과 효과는 상이한 서양의 안료들과 혼용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더 부각된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혹독한 해체와 희의를 거쳐 이제 한국화를 반성적으로 성찰해가는 단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와 미의식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만 수행한다는 입장이야말로 얼마나 당당하고 참신한 것인가.

한국화가 홍귀희가 바로 그러한 격동의 정체성 혼돈을 몸소 겪은 세대이다. 지난 8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화단에서 활동을 해오던, 8,90년대는 극심한 정체성 혼돈에 직면하여 성찰과 고뇌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은 세대로서 미의식은 더욱 유연해지고 회화의 양식에서는 확신을 담아내는 특징을 갈고 닦아 왔다. 양식적으로도 서구화로 기울어지는 실험이 있었는가 하면 전통적 요소들 가운데 현대적 미감에 어필하고 교감할 만한 내용들을 재정비하여 정당한 미학적 근거와 이유를 체험적으로 구현하는 세대의 특징을 작가는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청전(靑田)의 화폭에서 본 바 있는 소박하면서도 낯익은 주변의 산하를 그윽하고 포근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심산유곡을 관념적으로 완상(玩賞)하는 전통적 산수와는 궤를 달리하지만, 전통적 미의식과 화면형식, 기법, 재료 등에 충실한 점에서나 혹은 화면에 녹아 있는 관조적인 미학과 정서라는 점에서도 전형적인 한국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답적인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작가가 작업을 하고 있던 춘천 자택을 찾아 대면한 작가의 그림은 의외로 선이 굵고 간명한 미학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어서 목격한 한국화 현실이 “한국화가 죽어야 산다”는 극한적 역설의 상황을 익히 체험해 온 작가이다. 그렇다고 그 명제나 슬로건에 휩쓸리지도 않았지만 교조적으로 따라야 할 것도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써만이 살릴 수 있는 한국화라면, 그 역도 성립할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가 처한 동시대 상황이 한국화에 대한 기대치가 무엇인지를 예민하게 분석하고, 또한 주어진 한계 안에서 어떤 유형의 소통과 교감이 요구되는지를 화폭에 담아내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었던 것이다.

 

 

풀빛_64.5x55.5cm_장지에 수묵채색_2011

 

 

따라서 작가는 한동안 한국화가 현대화 명제에 급급하여 성급한 절충에만 몰입했던 한국화 화단의 현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적으로 말해 실험적 상황보다는 전통 쪽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작가의 화면은 먼 심산유곡의 절경이 아닌 가까운 소박한 자연 대상을 화폭에 담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화폭은 양식화된 도상이 아니라 자연 대상과 동시대인들 사이에 있어야 할 상호작용의 원리를 은밀하게 품고 있음이 발견된다.

작가의 표현적 관심은 자연의 외관 그 너머의 것에 더 쏟아지고 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공기, 대자연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기운, 주체와 자연 객체 간에 경험적으로 교감되고 있는 영감의 요체들을 담고자 하는 충동이 바로 화면의 필치에 잘 나타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작가의 화면은 일견 청전의 개성적인 필묵과도 유사한 데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단조로운 곡선적 구도와 여백의 처리 방식도 상당 부분 닮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작가의 필치는 더욱 미세한 담묵 세필의 직접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보일락 말락 하는 옅은 톤의 담묵이 세필에 실려 공기 층에 분무되듯 지면(紙面)에 내려 앉는 것 말이다.

청전의 미점법(米點法) 보다 분자의 단위를 더욱 미세하게 쪼개나가고 그것들이 수도 없이 직접 되는 작가의 화면은 일필휘지(一筆揮之)의 호방한 필법과는 극한의 대조를 이룬다. 작가가 이토록 극미세의 미점법을 선택한 것은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연의 외관보다는 그것의 내재적 질서와 본질에 접근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다루는 자연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대상이지만, 그 외관 너머의 현상들 그 자체가 더 큰 비중을 갖는다. 자연 그 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치열한 유기적 생명현상들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을 작가 나름대로 고심하지 않았을까.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만큼의 에너지를 등가적으로 대입한 그리기 행위가 바로 미세한 점들의 무한한 직접으로 나타난 점에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절제와 묵언적 표현이 일필휘지 못지않은 웅변으로 다가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작가의 이러한 필묵 화면은 여운이 가득한 사색과 관조의 공간을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화면질서는 다분히 추상적인 성향으로까지 비쳐질 수 있다. 실제 몇 가지 조심스럽게 시도하는 새로운 작업들은 더욱 추상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중요한 것은 추상성이 아니라 그 작업 내용들이 오늘의 미적 패러다임의 무엇과 어떤 연결 고리를 갖고 있느냐일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보는 바와 같이 필치가 치열하게 집적되면 될수록 기술(記述)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는 반비례적으로 닫히게 된다. 달리 말하면 절제와 과묵한 쪽으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화면의 해석적 자율성이 증가한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자연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무한한 생명의 대사현상들만큼 작가의 필선도 바삐 등가적으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작가는 주어진 구성 그 이상의 해석적, 상상적 자율성을 정중하게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고도의 정보사회는 유익한 정보만큼의 소음과 공해를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의 기능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입장에 있다면 알레고리와 은유의 수사학에 새로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왜 흑백사진이 최근 들어 더 각광을 받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작가의 화면은 자연의 실재성, 자연의 속살을 열어 보이려는 몸짓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화면에서 주어지는 그윽한 정취와 정서는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홍귀희

 

83년 상명사대 미술교육과 졸업 | 제1회 미술대전 입선(덕수궁) | 제2회 후소회 동상(문예회관) | 울산 한국화회전(1991 창립전~1999) | 개인전(2009) | 선화랑 개관33주년 기념 기획전(2010) | 춘천MBC R.Mutt1917 강원지역작가 초대전(2010) | 강원아트페어(2011) | 춘천 미협전 | 강원 미협전 | 한중예술교류전(2011)

 

 

 

vol.20111116-홍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