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 展

 

루시앙 피사로, 농자의 집 에라니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2009. 1. 6(화) ▶ 2009. 3. 25(수)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816 | 031-960-0180

 

www.artgy.or.kr

 

 

주  최 : (재)고양문화재단, MBC

후  원 : 고양시, 주한영국문화원, 주한프랑스문화원, 네이버

협  찬 : 더페이스샵, 요진건설, 현대카드, 농협하나로마트

출품작 : 피사로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 19명의 총 90여점의 유화 및 판화,   드로잉 등

입장료 : 일반 10,000원, 초중고 7,000원, 만3세 이상 유치원생 5,000원,

20인 이상 단체 2000원 할인, 장애우 50%할인(동반1인까지)

만 2세 이하/ 65세 이상 무료

 

 

루시앙 피사로, 다프니스와 클로에 포도수확

 

 

몸도 마음도 추운 설 연휴,

가족과 함께하는 따뜻한 미술관 나들이

: 카미유 피사로에게 배우는 위기극복의 지혜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불황은 바로 우리 집 안방을 위협하며,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이보다 더한 위기도 희망을 잃지 않고 굳은 신념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이겨 낸 앞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면서도 동료들로부터의 신뢰와 가족으로부터의 존경을 받으며 훌륭한 작품을 남겨 후대에까지 사랑을 받는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오늘날 가장 많은 이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은 당대에는 인정을 받기는커녕 멸시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들만의 방식을 탐구하여, 험난한 여정을 이겨낸 예술가들로 자신들에 대한 믿음으로 그 어려운 시절을 꿋꿋이 견뎌내었다.  

특히 피사로는 다른 화가들보다 세상의 인정을 받기까지 더 오랜시간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네, 르누아르 등 동료들과 함께 인상파 화풍의 기틀을 잡는데 그 맑은 고딕이 되어 동료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 예술가였다. 또한 화가로서의 힘든 삶 속에서도 가장으로서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로서 훌륭하게 자녀들을 키워 내었다. 이들이 함께 겪어낸 삶과 그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들과 함께 힘든 시기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해 보자.

고양 아람미술관은 오는 2009년 3월 25일까지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와 그의 동료 화가들, 밀레, 마네, 르누아르, 그리고 피사로 가족들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국내 최초로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특히 설 연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과 평온하고 따스한 예술가의 이야기와 함께 인상파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설연휴 기간동안 방문하는 관람객에게는 매일 100명씩 기념품을 증정한다.

“그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훌륭한 군주처럼 그를 대했다.” 폴 세잔

 

 

루시앙 피사로, 정원입구, 에핑

 

 

아버지의 의미

 

진정한 아버지란 세상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 주며, 나아갈 길을 앞서서 보여주는 존재이다.  

우리 주변을 사실적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 바르비종파에서 영향을 받은 피사로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새로운 그림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며, 인상파의 화풍의 기틀을 잡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풍경을 단지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서 나아가, 빛에 의해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이들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다르게 느끼는지에 대해 그려야 한다는 인상파의 주요 철학을 성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당대의 일반인은 물론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 속에, 동료화가들이 흔들릴 때마다 정신적인 멘토가 되어주었던 피사로를 동료화가들은 턱수염이 덥수룩한 예언자 모세라고 부르곤 했다. 피사로는 수많은 젊은 동료들의 친구였고, 인상파 그룹의 리더이자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살롱전에 거부당한 인상파 화가들의 독립적인 전시를 조직하면서 피사로는 1874년 제1회 전시를 시작으로 8회에 걸쳐 이어진 인상파전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화가로, 여러 화가들 사이에서 불화와 분열 속에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도 한 화풍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생각을 수용하며 당시 젊은 화가들의 시도를 주목하며 그 길을 격려하고 함께 걸었다.  

일례로, 점묘법으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쇠라는 8회 인상파 화가전에 참여하게 되는데, 모네와 르누아르는 이 점묘법의 경직성 때문에 불만을 품고 그들의 출품을 철회한다. 피사로는 30년이나 젊은 쇠라의 점묘법도 과감하게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이며, <창 밖의 풍경, 에라니 쉬르 엡트> 라는 걸작을 남긴다.  

그의 사려 깊고 이해심 많은 인품은 급진적이고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하는 젊은 화가들을 잘 수용했으며, 그 자신도 새로운 화법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까다롭기로 소문난 폴 세잔과의 교우는 세잔을 화가로 성장시킨 가장 중요한 계기였고, 세잔은 피사로를 스승으로, 아버지로 칭하게 된다. 이러한 피사로의 인간적인 포용력과 수용성은 상징주의란 새로운 길을 연 폴 고갱이 인상파의 마지막 단체전에 참가하게 하기도 했다.  

그의 인상파 동료들이 하나 둘씩 명성을 얻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으로 살며 성공의 그날까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런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한줄기 희망을 잃지 않았다.  

모든 차세대 예술가들은 인상파에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비웃음과 비참한 생활환경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냈고, 결국 시간이 지난 지금 대중들이 그림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켜 오늘날까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유파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굉장한 선생님이었다. 절대 학생에게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않았다. 에라니의 우리 집은 예술적 분위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 장남 루시앙 피사로

 

 

루시앙피사로,피사로부인,1923,캔버스에유채

 

 

존경 받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

 

피사로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열정적인 교육자였다. 여러 명의 가족 구성원이 그의 행로를 따라 화가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녀들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화가로서, 전원생활 속에서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을 꿈꾸었던 피사로는 아이들을 직접 집에서 가르쳤다. 언제나 동료 화가들의 왕래가 잦았던 에라니 쉬르 엡트라는 마을에 피사로의 집은 그 자체로 화가들의 집단 창작 스튜디오였다. 일곱 자녀를 낳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두 자녀를 제외한 다섯 자녀가 화가의 길을 걸었다. 어렸을 때 그들의 집은 마네, 모네, 르누와르, 고흐, 시슬리, 쇠라, 세잔 등의 그림이 걸려있었고, 그 화가들로부터 피사로의 자녀들은 직접 그림지도를 받기도 했다고 하니, 자녀들이 받았을 풍부한 정신적 자양분은 가히 상상하기 힘들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아내를 그린 그림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따뜻하게 빛을 발하고, 그 어머니를 다시 아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이 가족이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넘치는 생활을 보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피사로가 그의 아들 루시앙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은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작업에 대해 끊임없는 조언과 지도를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70이 넘어서까지 왕성한 작업활동을 했던 피사로는 화가로 성장한 큰 아들 루시앙의 의견을 존중하며, 아들 루시앙은 사랑과 존경으로 아버지의 의견을 따른다. 훌륭한 인간으로서, 인자한 아버지로서, 삶을 완성해 가는 피사로의 삶은 그림 이전에 그 삶 자체로 아름답다.  

이 전시는 단지 카미유 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추어 전시의 한 부분을 구성하여,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제방에 앉은 사람들과 풍경

 

 

피사로는 인상주의 그룹에서 가장 방대하고 실험적인 판화제작자였다. 그들은 화집을 출판하기 위해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피사로가 드로잉한 것을 루시앙이 목판으로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카미유와 루시앙의 편지에서 가족사 뿐만 아니라, 이런 실질적인 작품에 대한 논의와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던 과정이 잘 나타난다.

 

너무나 인간적인, 그리고 따뜻한

비록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했지만 꿋꿋한 예술적 신념을 지키며 인내와 포용으로 동료와 가족들을 이끌었던 그의 그림은 그래서 참 따뜻하다. 그 따뜻함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훈훈한 위로가 되며 한 켠 삶의 지혜를 내뿜는다. 

피사로에게 창조란 단순한 손재주로 자연을 기가 막힌 솜씨로 옮겨 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인간적인 것이었다. 이에 그의 친구 에밀 졸라는 “나는 이토록 훌륭한 깊이감을 보여주는 그림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라고 극찬을 마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대지의 심원한 목소리와 나무의 힘찬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물러서는 지평선, 호화로운 느낌과 자극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표현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그의 수수하고 정직한 성품과 예술로부터 순수한 영구적인 진리를 창출하려고 한 진지한 노력이 엿보인다. 

피사로는 당대 부르주아의 오락이나 활동적인 도시민들의 취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인생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지내며 일상적이고 평범한 시골생활을 주제로 작업을 많이 했다. 그는 비교적 짧은 붓질로 색들이 이루는 다양한 색조변화를 구사하며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전달하는 그의 그림 속에는 사람과 여타의 만물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공존하며, 그가 꿈꾼 이상세계를 보여준다.

 

에두아르 마네, 교회가 있는 마을 풍경

 
 

 

 
 

vol. 20090106-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