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옥 개인展

 

- Body Culture Medium -

 

 

 

노암 갤러리

 

2006. 7. 19(수) ▶ 2006. 7. 28(금)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33 | 02-720-2235

 

www.noamgallery.com

 

 

 

 

공포스러운 억압과 흥겨운 생산이 공존하는 삶의 실험실

 

이선영|미술평론가

대륙적인 스케일로 몸풍경을 펼쳐보였던 작가 김재옥은 이번 전시에서 몸을 세포배양기(Cell Culture Medium)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2층 전시장 벽면을 거의 전부 뒤덮는 작품 [Body Continental Medium]은 포즈가 다른 같은 사람들을 이어붙여, 복제된 몸을 표현한다. 몸의 일부분이 서로 붙어 뒤엉킨 대형 누드는, 좌우로 길게 설치된 기념비적 스케일을 가지는데, 동일한 누드의 여러 포즈가 나열됨으로 인해 운동감이 발생한다. 얼굴이 없는 누드들은 실험재료들처럼 철저히 익명적이며, 무기질 표면과 유기질의 중간정도 되는 질감을 가진다. 또한 그것은 피부 껍질을 한꺼풀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피하조직층같은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관객의 눈 앞에 거대하게 펼쳐지는 대륙같은 몸뚱이에는 광물질이 박힌 상처 자국이 간간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몸은 땅이고, 상처는 자원을 얻기 위해 파헤쳐진 이미지과 중첩된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구멍이자 노천 광산인 시베리아의 ‘Kola Hole’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자원으로서 착취되는 몸과 대지의 동병상련을 표현한 것이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구멍, 착취되는 빈 공간의 이미지는 자궁으로 집약된다. 그는 자궁의 벽면을 그린 작품 [womb wall]에서, 여러 층의 배엽들로 싸인 빈공간, 발생하는 배의 절단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숲처럼 빼곡한 다른 세포들에 의해 보호되어 있는, 몸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생명의 거처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의 이합집산을 동력으로 하는 기술문명에 의해 유린될 처지에 놓여있다. 물질적 이익을 위해 지구 깊숙한 곳까지 파헤쳐 내려가는 물리적인 운동과 동일한 메카니즘에 의해, 자궁은 생명을 생산하는 배양기로 전락한다. 이 인공배양기에서 가공할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 [Body Continental Medium-변이] 시리즈이다. 그것은 두개의 몸이 합쳐져 만들어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통해 무모한 실험의 산물들을 예시한다.

 

 

 

 

중앙에 보이지 않는 축이 있는 이 괴물들이 클론이다. 인간같기도 하고 개구리같기도 한 모호한 동물, 여성의 질이 확대된 듯한 기관, 서로 다른 개체가 합체된 것, 샴 쌍둥이처럼 옆구리가 완전히 붙은 것, 꼬리가 달린 괴물 등 5점의 그로테스크한 몸체들이다. 이들 모두는 붉은색, 또는 녹색 계열을 띄고 있다. 살아 생동하는 자연의 빛깔이기 보다는 동물과 식물을 대표하는 표준적인 색상을 가지고 있다. [Body Continental Medium-분재]는 사람들의 사지가 이루는 복잡한 실루엣이 분재의 형상을 이루는 작품이다. 인간군체들은 대지가 아닌 작은 배양기에 의존하면서 한데 얽혀 아웅다웅하는 모습이다. 어떤 힘에 의해 뭉뚱그려진 인간 군상들은 자연스러운 성장이 왜곡되어 만들어낸 관상용 식물과 중첩된다. 그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 군체로 훈육되는 인간의 상황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생명체의 절단면 같은 등고선 형태의 내부을 보여주는데, 자원으로서 파헤쳐지는 몸-대지의 이미지라는 연속성을 가진다. 복제를 통한 자연의 재생산 또는 착취라는 동시대적인 주제를 표현하는데 있어, 김재옥의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지점은 과학에 대한 관심, 섬유예술, 회화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종합됨으로서 가능했다. 세포질같은 형태를 표현하는 특이한 표면 질감은 염색 방법 중 소금염을 사용한 것인데, 그것은 소금의 건조도, 염액의 농도, 습도 등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문양이다. 염색이라는 기법으로 기본 질감을 만들어내고, 캔버스 천위에 배접을 하고 유채로 형태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공예도 그림도 아닌 새로운 표면, 요컨대 스며듬과 덧붙임, 우연과 필연, 부드러움과 악센트 등이 공존하는 질감이 형성된다.  

  

 

 

 

개발 또는 착취되는 자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 그것은 무정형의 질료로서 간주된 수동적 자연과 이성의 형식적 논리가 양극화된 산물이다. 인간이 세포배양기가 된 것은 몸을 기계로, 의사 및 과학자를 기계공으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식 모델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간을 만물의 주체로 고양시킴으로서, 그리고 자연을 전면적으로 도구화시킴으로서 결과된 것은 무엇인가.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채 나열된 김재옥의 유기체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과 핵심이 빠져있다. 여기에는 인간이 인간을 사육하고 길들이며, 나아가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의 형질선택 및 설계를 넘보고 있는 현실이 깔려있다. 특히 작가는 클로닝의 부산물인 변종 생물들을 통해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위험한 실험을 경고한다. 지구에 거대한 구멍을 뚫거나, 인간을 배양기로 재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과학이 거대한 산업체계로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대형 프로젝트도 다국적 생명공학 회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 시스템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구조와 연관된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일련의 형식을 위해 다수가 한데 뭉쳐진 분재로서의 인간들이 그러하다. 특히 그의 자궁 시리즈는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재생산 기술에 대해 언급한다. 품종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 실험처럼, 자연적 과정을 병리적, 실험적 과정으로 변형시키는 배후에는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가로놓여 있다. 그의 작품은 인공수정, 난자기증, 대리모같은 테크닉이 황금알을 낳는 첨단기술로 평가되는 시대와 관련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몸이 새로운 방식으로 통제되고 상품화되고 있다. 생물의 화학적 맑은 고딕을 이루고 있는 DNA의 메카니즘을 인간이 이해함으로서, 유전자 텍스트의 편집을 통해 인공적 돌연변이를 만들고, 자연의 진화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과학을 통해 인류를 개량한다는 유토피아적인 목적은 자연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괴물의 탄생을 예시하고 있다. 중복 쌍둥이(이중체) 등 김재옥의 작품에 자주 출몰하는 기형의 생태학은 환상적인 미술작품을 물론이고, 우주형상지나 세계연대기, 고지도, 박물지 등을 장식해 오던 괴상한 시각 전통과 연결된다. 이러한 전통에서 기형은 부조리함과 경이로운 형상이라는 후광을 동시에 지닌다. 그의 작품에는 개체들이 명확한 한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엉겨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스케일이 커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파악하기 힘들고, 명료한 시점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무너뜨린다. 자아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명료한 간격이 혼란에 빠지고 이질적인 공간이 두드러진다. 유기체는 전후좌우의 구별이 없이 뫼비우스 띠처럼 한없이 펼쳐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은 적절한 한계가 아닌 초과, 또는 잉여로 특징지어진다. 경계의 소멸은 병적 징후를 나타낸다. 그것은 병원균같은 타자에 침입된 상태를 말한다.

주체는 한계를 통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김재옥의 작품에서 이 한계는 위반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비천함(abjec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짐으로서 출현하는 이질성의 실체를 규명한 바 있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피부 위에 새겨진 징그러운 상처나 정체를 알수 없는 이상한 합성 생물체들은 아브젝션에 점령된 개체를 표현하고 있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 보다는,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 아브젝션은 불안을 야기하는 이질성이다. 그것은 타와 타자, 안과 밖의 구별이 파기되는 모호한 형상을 통해 공포를 낳는다. 아브젝트에 점령당한 사람은 스스로를 인식하거나 욕망하거나 어딘가에 속한다기 보다는, 밀려나고 분리되고 방황하는 존재이다.

 

 

 

 

김재옥의 작품에 나타나는 모호한 유기체들은 단일성, 통합성, 동질성을 가지지 못하고 나뉘고 접혀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이 단순히 계몽주의에 입각한 문명비판 류의 고발성 메시지를 넘어서는 지점은, 뭔가 변질된 것, 동물 속에 이미 살고있는 이질성의 흐름을 새롭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질성은 반드시 재앙과 공포만은 아니다. 아브젝트의 한 면은 육체적인 증상에, 다른 한 면은 승화과정과 나란히 한다. 육체적인 증상은 동화될 수 없는 이상한 육체 속의 구조, 괴물, 종기나 악성 종양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승화과정은 명명화되기 전의 것이나, 대상이 되기 전의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단순히 증상 속에서라면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된다. 그러나 승화과정을 통하면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아브젝트는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너머의 것으로 나를 감싸며, 부풀리고 넘쳐나게 한다. 그것은 일탈이자 구획의 불가능이고 완전한 결핍, 즐거움, 매혹인 것이다. 수많은 균열로 이루어진 김재옥의 작품 속 유기체들은 우리의 상징세계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고뇌가 있다.

여기에서 나르시시즘의 거울은 산산히 균열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브젝션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위기이다. 그것은 자아가 존재하기 위해 그곳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혐오스러운 한계라는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로서 자아는 비자아, 충동, 그리고 죽음의 원천으로 다가가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삶의 굴곡들 속에 고여있는 죽음의 충동을 새로운 의미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거대한 표피는 주변화되고 통합되지 않은 것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안과 밖의 경계선을 수시로 위반한다. 이렇게 부글부글 끓는듯한 상태에서 무엇인가 생겨나고 있다. 미셀 세르는 순수한 것들은 생성물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냉동 상태에서는 혼합의 위험이 없고, 모호한 타협이 금지되며 에너지가 차단된다. 엔트로피가 증대되는 증식, 부패 반응 속에서 환부의 고름을 짜내는 것과 같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결코 불순함을 축출한 적이 없다.  

특히 김재옥은 순수와 오염의 시험무대라 할 수 있는 자궁에 주목한다. 그것은 플라톤이 본능의 수용체라고 명한 ‘코라’(chora)같은 것으로,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인간의 충동을 원초적 어머니의 수용체적 특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충동은 사회화된 상징언어를 교란시키면서 출몰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전복적인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본능의 수용체로서의 자궁은 혐오와 매혹,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이러한 공존과 혼합이야말로 예술작품의 조건이 된다. 또한 생명의 조건이 된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생명의 맑은 고딕은 소금기가 있는 늪이나 바다같은 혼합물이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것에서는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이 구별없는 덩어리로부터 시작된다. 작은 거품으로 뒤덮인 듯한 김재옥의 유기체들은 모든 단단한 존재의 선결조건으로서 부글거리는 유동적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좌우로 길게 펼쳐진 몸풍경은 안팎의 구별이 없는 표면으로서의 몸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 원제 ‘Volatile Bodies’](1994)에서 주체를 뫼비우스 띠로 비유한 라캉의 논의를 발전시킨다. 여기에서 몸과 마음은 두가지 뚜렷이 구별되는 실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일한 실체에서 기인하는 두가지 다른 속성도 아니다. 이 모델은 내부가 외부로, 외부가 내부로 흘러드는 통제할 수 없는 통로와 벡터를 보여준다. 김재옥은 신체 내부에서 바깥을, 바깥에서 내부를 보는 듯한  안팎 뒤집기를 통해 몸을 재형상화 한다. 이것은 주체성을 깊이로서의 모델이 아니라, 표면의 모델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의 표면성을 강조하는 것은 작품의 광대한 스케일 뿐 아니라, 악센트처럼 박혀있는 광물성 장식이다. 그것은 상처이지만, 문신이나 피어싱같이 몸의 표면성과 관능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용가치와 상품으로 환원되어 가는 문명화된 몸을 거부하는 야만적(savage)인 몸이다.

그것은 몸의 유기적 조직화를 거부하고, 유기체의 한계를 넘어서 이몸과 저몸이 한데 얽혀있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기관없는 몸’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단단한 실체, 고착화된 몸을 폭파시켜 수천개의 미세한 고원으로 증폭되는 몸이다. 여기에서 몸은 가변적이고 휘발하는 성질을 지닌다. 유기적 조직이 산산조각난 기관없는 몸을 죽은 몸이 아니라, 더욱 살아있으며 다수성으로 가득찬 몸이다. 기관없는 몸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몸을 탈자연화시키고, 그것을 타자의 몸과 다른 사물들의 흐름이나 분자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매끈한 피부 대신하는 수많은 돌기들로 형상화된 몸은 계층화와 기능을 넘어서 오직 강도만이 흐르고 순환하는 질료가 된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몸은 단단한 영토의 경계선을 위반하고 탈주하는 분자적인 흐름이 된다.

여기에서 모든 본질적인 ‘이다’는 ‘되다’로 변형된다. 정체성, 단일성, 고유성을 위해 침전되고 축적된 앙금과 소유물을 흩뿌려서 낙진으로 만드는 것이 ‘되기’(becoming)이다. 미세한 돌기들로 이루어진 몸은 축적된 침전물들을 흩뿌리는 분자적(molecular)인 형태로 탈질량화(demassify) 된다. 되기는 주체의 고착과 안정된 통일성과 유기체화, 구조화에서 탈주하는 선들의 운동이며, 정체성의 폭파로 인해 열리는 다수성이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몸은 불연속적이고 비총체적인 일련의 과정으로서의 나타난다. 그것은 결핍이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증식과 자기 확장이라는 이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욕망이 관통하고 있다. 욕망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는데, 여기에 생산은 파편, 몸의 파편들, 대상의 파편들 사이에 연계를 창조하는 과정들로 구성된다. 욕망은 실험하고 언제나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김재옥의 [몸 배양기] 시리즈는 단순한 문명 고발의 차원을 넘어서, 보다 긍정적인 생산의 입장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배양, 배양액으로부터 문화가 탄생한다. 더러운 것들을 분리하고 몰아내며 제거하는 것은 이분법의 결과이다. 부패와 전염병은 유해함과 창조성을 동시에 안겨준다.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도 부패는 삶의 실험실’(루크레티우스)인 까닭이다. 작가는 생명공학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인간의 지평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표현한다. 생명공학으로 다시금 강조된 ‘포스트 휴먼’의 시대에, 몸과 공간이 다시 화두로 부각되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다. 진보라는 직선적 시간과 그 시간의 의식적 주체가 해체된 잔여물이 바로 몸과 공간이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대지로 나타나는 광막한 공간성과 결합된 몸은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유목하는 욕망이 되기도 한다.

김재옥의 작품에서 몸은 백짓장 같은 순수한 자연의 본질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무심하게 투사시키는 중립적인 스크린도 아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기원이나 불변의 틀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작용과 재현체계가 직조되고 구성되는 곳이다. 몸은 문화적으로 직조되는 자연의 산물인 것이다. 그것은 오래된 지층처럼, 텍스트처럼 흔적과 차이를 보존하고 있다. 그로츠는 그동안 몸이 자연과학의 담론적 실천, 그중에서도 생물학과 의학 담론을 통해 식민화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몸은 만연된 권력의 요청에 적응하게 된다. 그것은 육신을 특정한 유형의 몸으로 만들어낸다. 문화적인 요청에 적합한 몸이 되거나 부적절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어느 한편에 완전히 귀속될 수 있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의식의 통제를 비집고 빠져나간다. 여기에서 몸의 공포와 매혹이 존재한다.

김재옥은 몸의 가장자리, 경계지대를 강조한다. 이러한 경계지역에서 아브젝트가 출몰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의 승화적인 형태로 심미적이고 신비적인 작품을 예시한다. 그녀에 의하면 결국 작품을 한다는 것은 아브젝트를 상상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아브젝트와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타르시스적인 관점에서 예술적 경험은 분명 아브젝트를 말하고, 그것을 통해 정화된다. 예술은 이러한 실천을 통해 사회의 상징적인 구조의 뿌리를 뒤흔들고, 주체의 허물어질 듯한 한계를 상상한다. 주체와 대상이 전락하는 지점은 죽음과도 닮아있다. 그리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부활과 같은 것이 된다. 이때 영혼은 광란과 순수에 동시에 다가섬으로서, 미지의 것으로 뻗어나간다.

김재옥(金在玉)

 

 

 

 
 

김재옥

2002 홍익대학교 섬유미술과 졸업 | 2005 경희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수료

개인전

2005 Body Continental - 국립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한국  | 2003 자유는 없다 “측은지심” - 킴벌리갤러리. 뉴욕. 미국 | 2003 자유는 없다 “염화미소” - 한전아트프라자갤러리. 서울. 한국 | 2001 자유는 없다 “불행한자유” - 다임갤러리. 서울. 한국

아티스트 레지던스

2005-2006 국립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장기프로그램 - 서울. 한국

 
 

vol.20060719-김재옥 개인